‘두 가문의 특별한 30년 인연’현씨, 신한해운 창업주로 후발 현대조선 정씨에 조언주며 인연정씨 제안에 사돈 맺고 신한 합병한 현대상선서 줄곧 회장직지난 10월6일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에서 현정은 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이 김윤규 사장(오른쪽에서 두번째)등과 함께 테이프을 자르고 있다.현영원 회장이 현대 뉴월드호의 취항식에서 처녀항해를 알리는 첫 고동을 울리고 있다.현대그룹의 사돈 집안으로 정씨 일가의 영광과 내리막을 온몸으로 함께 했던 현씨가(家). 지난 10월21일 고 정몽헌 회장의 미망인 현정은씨는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으로 선임되면서 위험지대에 놓여 있던 그룹의 대권을 움켜쥐었다. 결코 계획에 있던 바도, 바라던 바도 아닌 길이었다.

현 회장은 “고인의 뜻을 좇아 남은 대북사업의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말로 경영권 획득의 목적을 표명했다. 정몽헌 회장의 예기치 못한 자살로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현정은씨와 현씨 가문. 현씨가와 정씨가의 30년 인연을 짚어봤다.현정은 회장의 아버지인 현영원 현대상선 회장 가문은 정주영 회장의 여러 사돈댁이 그렇듯이 특별히 남다른 면모를 갖춘 집안은 아니다. 사돈의 막강한 재력에는 관심 없다는 듯 조용히 지내온 것을 보면 전통적인 현모양처를 떠올리게 한다.그러나 현 회장의 아내인 김문희 여사쪽은 현정은 회장 일가도 그리 만만한 집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김용주 전남방직 창업자는 현정은 회장의 외조부이고 김창성 경총회장과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은 외삼촌이다.

현영원 회장이 전방의 사위가 된 배경은 젊어서 명석했던 현 회장의 그릇을 알아본 고 김용주 회장의 혜안(慧眼) 때문이라고 한다. 현 회장은 48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51년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공부벌레였다.56년 한국은행 도쿄지점에서 근무하던 현영원 회장은 서울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재무부의 중간 간부였다. “현영원씨 재무부에서 과장으로 일해볼 생각 없습니까?” 현영원 회장은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아니, 관(官)으로 진출하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사진2>현 회장은 그길로 귀국, 장인어른인 김용주 회장을 찾아갔다. 자신의 뜻을 전하고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장인으로부터 적극 찬성을 얻을 줄 알았던 현 회장은 전혀 의외의 답을 듣는다. “한은 같은 좋은 직장에 다녀서 그동안 말을 못했다. 재무부에 갈 바에야 내 회사에서 일하는 게 어떠냐.”현 회장이 입사 6년만에 사표를 던지고 한국은행을 나와 장인 회사인 신한제분과 근해상선의 전무로 갔다. 이것이 현영원 회장이 해운업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정주영과의 만남

현영원 회장이 국내 해운산업의 ‘큰 어른’으로 불리는 데는 당시 척박했던 해운산업에 과감히 뛰어들어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던 데서 비롯된다. 정주영 회장이 국내 최대 해운사인 현대상선을 창립한 게 76년이니 정 회장보다 20년 선배인 셈이다.현 회장은 56년부터 60년까지 근해상선을 경영하다 60년부터 64년까지 대한제철로 업종을 바꾸기도 했다. 그의 이력을 자세히 보면 금융사의 이사나 언론사의 비상임이사를 역임한 적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해상 장사꾼’을 떠난 적이 없다. 대한제철 사장을 역임한 것이 현 회장의 일생에서 유일하게 외도를 한 시기였다.64년 현 회장은 남은 인생을 좌우하게 되는 ‘신한해운’을 창업한다. 신한해운 사장에서 쌓은 해운업 관록이 둘째딸(현정은)의 혼처를 구하게 되고 현대상선 회장을 역임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현 회장은 신한해운에서 비로소 해운업의 ‘걸물’로 거듭났다. 국내외 크고 작은 해운사들의 선주들과 인맥을 쌓고 그 분야에서 경영능력이 입소문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현 회장은 특히 홍콩 선주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신한해운이 홍콩 선사들의 한국대리점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마침 현대조선을 설립하고자 국제적인 선주들로부터 수주를 따러 다니던 정주영 회장이 현 회장을 찾아간 것은 하나의 수순이었다.현대조선이 설립된 배경을 보면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에 의해 자유주의 쇠퇴가 선언되고 보호무역주의 시대가 열린 때를 정점으로 우리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미국이 경공업제품의 수입규제를 강화하자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우리나라 수출에 타격이 미친 것이다. 정부로서는 이미 60년대 말부터 국가 수출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기로에 서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현대를 독려했다. 마침 조선에 관심이 있던 정주영 회장은 과감히 뛰어들었다.이때 정인영 부사장(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조선(造船)은 쉽빌딩(Shipbuilding)이라고 합니다. 제조(製造)가 아니라 건조(建造)라 이겁니다. 건설 잘하는데 건조 못하겠습니까?”라며 정주영 회장을 부추겼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과 같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으로 한라그룹을 창업, 재계에서 일가를 이룬 정인영 회장은 훗날 외환위기로 그룹이 해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사진3>정주영 회장은 약 2년여간 조선소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71년 영국으로 건너가 A&P 애플도어로부터 차관을 끌어왔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500원짜리 지폐 일화다. 애플도어 회장에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든 민족임을 각인시켜 극적인 수락을 받아낸 것이다.

“현사장, 둘째딸 우리 몽헌이한테 주소”

72년 1월 울산시 미포만 현대조선 건립터. 혹한의 강추위 속에서 정주영 회장이 선주들을 대상으로 구체적인 조선소 건립계획을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든든한 조력자 현영원 회장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 모인 선주들 중 상당수는 현영원 회장이 불러들인 사람들이었다.초라한 백사장 위에서 열변을 토하는 정 회장을 바라보며 선주들이 황당한 기색이 역력해질 무렵 현 회장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 사람 눈빛 봐라. 사업은 사람이 하는 것 아니냐. 또 배를 안지어주면 보증을 선 외환은행이 손실금액을 물어줄 것이니 아무 걱정마라. 앞으로 이 회사 크게 될 거다.” 현 회장의 예언이 적중해서일까. 현재 현대중공업은 세계 대형 선박 수주량의 20%를 점유하고 있다.현영원 회장과 정주영 회장의 좋은 인연은 계속됐다. 두 사람의 우정이 정점에 달할 무렵 인연의 꽃을 피우게 된다. 혼담이 오간 것이다. 먼저 얘기를 꺼낸 사람은 정주영 회장이었다. 정 회장이 평소 저돌적이면서도 소탈한 성격이었던 것이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자신보다 12살 위였던 정 회장을 사업상 파트너이자 형님처럼 따르던 현 회장은 정 회장의 혼청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현정은씨 배필로 정몽헌씨를 사위로 맞이했다. 현대중공업이 일부 선주들로부터 선박 인수를 거부당해 어려움에 처해지던 76년의 일이었다.현대 비자금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대상선은 현대중공업 선주들이 선박 인수를 거부하는 바람에 공중에 떠버린 대형 선박을 활용하자는 차원에서 설립된 회사였다. 정주영 회장이 애초에 의도하지 않은 사업체를 꾸리게 됐다고는 하나 지금에 와서는 현대그룹의 최대 수익원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정 회장은 현대조선 설립 직전인 71년 세계 해운업계의 거물 인사였던 그리스의 리바노스가(家)로부터 25만9,000톤(DWT)급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리바노스를 잡음으로써 신생 조선사로서 국제적 신인도를 단번에 끌어올리려는 정 회장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74년 오일쇼크로 세계경제 침체와 유조선 경기 불황으로 리바노스는 유조선 1척을 놓고 용선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자 일방적인 선박 인수 거부를 선언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C.Y.퉁이라는 홍콩의 선주로부터 2척의 유조선 인수를 거부당했다. 이로써 모두 3척의 초대형 유조선이 무국적 상태로 울산 앞바다에 묶이는 광경이 연출됐다.이 배들을 가장 아까워 한 사람이 현영원 회장이었다. 현 회장은 해운업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정주영 회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꼭 팔아야 장삽니까? 회장님이 직접 쓰면 되지 않습니까” 간단한 논리였다. 어차피 못 팔 물건이면 이 물건으로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현 회장의 간단명료한 사업수완에 정 회장은 무릎을 쳤다. 76년 3월 아세아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을 출범시킨 배경이 됐던 이때 일을 생각하면 현영원 회장은 지금도 감회에 젖는다고 한다.

사돈 계열사의 회장으로

현영원 회장이 정주영 회장에게 제안한 사업 아이템은 그러나 현 회장에게 아픔을 주기도 했다. 84년 신한해운이 현대상선에 흡수합병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칫 쉽게 생각하면 정주영 회장이 사돈 회사를 적대적 M&A로 인수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은 정부 시책의 결과였다.79년 하반기부터 81년까지 해운경기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해운업계는 느닷없이 자금이 대거 유입되자 중고 벌크선 도입에 주력해 선복량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81년부터 불어닥친 최악의 해운불황으로 도미노 도산을 불러왔다. 심지어 선박이 해외에서 억류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이에 따라 외항해운업계는 고강도 자구책 마련에 부심했으나 이미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남은 건 정부조치뿐이었다.

84년, 정부는 해운산업합리화조치를 발표하며 국내선사간 합병 또는 운영선사를 설립하되 운영선사로 참여하는 경우, 위탁선사는 2년 내에 운영선사에 흡수합병 하도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현대상선은 이때 3개 해운사를 위탁운영하고 1개사를 인수했는데 신한해운은 3개 위탁운영사 중 하나였다. 본래 어떤 유형의 기업인이든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를 남의 손에 넘길 때는 말로 표현 못할 비애가 따르기 마련이다. 하물며 한때 해운업의 거물로 불려지던 현영원 회장은 오죽했으랴.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위로와 예우는 극진했다. 현영원 회장이 84년 이후 지금까지 현대상선의 회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비록 몇해 전부터는 이사회 일원에서는 물러났지만 20여년간 ‘고문’ 내지 ‘명예회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은 채 회장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두 집안이 혈육 이상의 친목을 다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현영원 회장은 ‘사업은 운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10여년전 한 기념식에 참석한 현 회장은 평소 알고 지내던 직원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고 한다. “중공업이나 상선이나 운 좋아 일어선 것 아니다. 어른(정주영 회장)이나 나나 참 고생 많았다.” 사돈과 사돈 기업에 대한 각별한 애정 표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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