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3 지방선거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자유한국당의 참패 후유증은 한 치 앞을 장담 못할 만큼 심각하다. 오죽하면 의원 전부가 사퇴하여 보궐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런데 정말 의아스러운 일은 이번 선거로 ‘보수가 궤멸됐다’느니 ‘보수가 폐기됐다’라는 말이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에서조차 나오고 있는 사실이다.
도무지 어떤 근거로 보수가 궤멸됐다는 건지, 무슨 잣대로 보수가 폐기됐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국당이 17개 광역단체 중 대구와 경북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졌기 때문인가· 정통 보수 지역인 부산, 경남, 울산을 집권당인 민주당에 내줬기 때문인가· 서울 25개 구청 중 달랑 서초구 한 곳에서만 승리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12개 광역단체를 휩쓸고 서울의 25개 구청을 싹쓸이했으니 진보가 궤멸됐다고 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진보가 궤멸됐다면 어떻게 지금 정권을 되찾고 지방선거에서 거의 싹쓸이를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때도 진보를 대변한다던 정당을 유권자들이 선거로 응징한 것이 지금과 다를 바 없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율이 바닥을 친 데다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던 집권 여당 열린우리당이 친노·비노의 극심한 계파 갈등을 빚고 있었던 터다. 유권자들은 그러한 정당을 내친 것이지 진보를 궤멸한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2016년 새누리당은 그러했던 10년 전 열린우리당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해 보였다. 친박·비박의 계파 갈등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비박계는 끝내 자당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는 어이없는 일을 자행했다. 진노한 유권자들은 20대 총선에서 180석을 장담했던 새누리당에게 경고장을 날리고, 이어 탄핵 후 치러진 조기대선에서 철퇴를 가했다. 
그러한 유권자 주체가 바로 스윙보터(부동층)들이다. 그들은 2006~2007년 때나 10년 후에도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 프레임으로 투표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정치상황이나 관심 분야 정책에 따라 선택을 달리했을 뿐이다. 
이처럼 선거에서는 항상 ‘좌’‘우’ 편견에 의해 투표하지 않는 그들의 선택에 따라 승부가 결정돼 온 것이다. 이들은 평소엔 정치와 담을 쌓은 듯 보이지만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현실을 단호하게 뒤바꾸어 놓는다.
이번 6.13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도 결코 상황이 빗나가지 않았다. 스윙보터들은 지난해 대선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한국당을 또다시 응징하고 나섰다. 보수와 진보 유권자들은 언제나처럼 별 변함이 없었다. 이는 정당 득표율에서 나타나고 있다. 민주당은 지난 대선 때보다 10.3% 상승한 반면, 한국당은 3.8% 정도 상승에 그쳤다. 이는 스윙보터들 중 다수가 민주당으로, 소수가 한국당으로 각각 흡수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선거 승패의 열쇠는 보수와 진보가 쥐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념과는 무관한 스윙보터들이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때문에 ‘보수 궤멸’이니 ‘보수 폐기’니 하는 말은 맞지 않은 얘기고 단지 한국당이 몰락하고 궤멸된 것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당 스스로가 ‘보수 궤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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