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박정희 지시로 중정이 창설·‘김정일 거처 습격’ 등 대북임무
실미도 부대원은 특수범·현역군인 아닌 ‘민간인’

 
1968년 4월 북파공작을 목적으로 창설된 실미도부대(공군 2325부대 소속 209 파견대)에서 4명의 공작원이 적법한 절차없이 부대 내 상부의 지시에 따라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실미도부대는 박정희 전(前)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주도적으로 창설했으며 사형이나 중형을 받은 군(軍) 특수범이나 현역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걸어 대원들을 모집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는 2006년 7월 13일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실미도 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훈련 중 탈영을 시도했거나 기간병에게 반말 등을 한 이유로 5명이 동료들에 의해 살해됐다.
 
1968년 4월 1일 부대가 창설(創設)된 뒤 3개월 만인 같은 해 7월 고된 훈련 등으로 탈영을 시도한 이부웅, 신현준 씨 등 2명의 공작원이 몽둥이 등을 동원한 구타로, 1970년 8월에는 부대 기간병에게 반말 등 ‘하극상’을 했다는 이유로 윤태산 씨가 역시 실미도부대장 및 교육대장의 지시를 받은 동료 공작원들에 의해 각각 살해됐다.
 
또 ‘무의도 강간사건’ 범인인 강찬주도 부대 상부의 지시에 따라 1970년 11월 흉기로 살해됐다. 공범 강신옥은 상부의 지시는 없었지만 같은 달 흉기에 찔려 치료를 받지 않은 상태로 방치돼 결국 사망했다.
 
과거사위는 공작원 살해와 관련, “실미도부대 상급기관의 교사나 방조 등이 있었는지는 관련자들의 증언거부 등으로 진상규명에 한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과거사위는 실미도부대의 창설 배경에 대해 “북한의 1.21사태(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시도)에 대한 대응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가 주도적으로 창설했으며 공군은 이에 적극 협조, 부대 관리 책임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과거사위 관계자는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부대 창설을 지시했다는 것은 관련자들의 증언을 기초로 한 것이며 문서를 통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고 말했다.
 
총 31명의 공작원들은 사형이나 중형 등을 받은 특수범이나 현역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었으며 모집관들은 ▲훈련 후 장교 임관 ▲임무 수행 후 원하는 곳 배속 ▲미군부대 취직 등 당초부터 지키지 못할 약속을 제시해 구두계약 형식으로 이들을 모집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공작원들에게는 ‘김일성 거처습격’ 등의 대북 특수임무가 부여됐지만 모집 당시 북파공작 임무의 위험성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지를 받지 못했으며 3년 4개월간 무인도인 실미도에 강제로 격리돼 사실상 구금상태에 있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공작원들에게는 처음 3개월동안은 모집 조건으로 제시됐던 급식, 장교후보생에 준하는 보수 등의 약속이 대체로 지켜졌지만 이후부터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은 것은 물론, 비인간적인 대우와 형편없는 급식, 서신교환, 외출·외박 등이 철저히 차단되는 등 기본권이 박탈됐다.
 
과거사위는 1971년 8월 23일 공작원들의 탈출사건(실미도사건) 발생배경에 대해 “구타, 살해 등 일련의 부대 내 상황에 절망감을 느낀 공작원들이 청와대 등 상급기관에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부대를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중앙정보부에서 내려온 예산이 실미도부대 운영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공작원에 대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상부에서 착복 또는 횡령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실미도사건 이후 부대의 성격을 은폐하기 위해 정부는 사실상 민간인인 공작원들의 신분을 공군이 관리하는 특수범들이라고 발표했으며 관할부대인 공군 2325부대도 사건 당일인 1971년 8월 23일과 1998년 두 시기에 걸쳐 공작원들의 개인 이력카드 등 관련 서류를 소각, 철저한 은폐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실미도사건 생존 공작원 4명에 대한 군사재판 과정에서도 가족들에게 이들의 구속 사실을 고지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재판이 가족들의 방청이 불허된 채 비공개로 진행되고 사형 집행 후 시신도 유족들에게 인도되지 않았다.
 
당초 생존 가능성이 언급됐던 공작원 김기정씨의 경우 경기도 벽제에서 나온 유골에 대한 DNA 검사결과 사망한 것으로 판명났으며 탈출 당시 공작원이 버스안에서 공포를 발사한 적은 있지만 동료 공작원들을 사살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당시 조사를 통해 총 31명의 공작원 가운데 무연고자 8명을 제외한 23명의 유가족이 확인됐고 경기도 벽제에서 실시한 유해발굴 작업에서 총 20개의 시료를 채취해 서울대법의학 교실에 의뢰한 DNA 검사 결과, 공작원 8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공작원들의 탈출 과정에서 공작원 20명과 민간인 6명, 경찰 2명, 군인 18명 등 총 46명이 사망하고 15명의 군인, 경찰, 민간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훈련 도중 구타 및 사고 등으로 사망한 7명과 실미도사건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듬해인 1972년 3월 사형이 집행된 4명을 포함해 실미도부대와 관련해 사망한 사람은 모두 57명에 이른다.
 
과거사위는 “공작원들이 탈출과정에서 기간병들을 사살하는 등 일련의 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로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공작원들의 인권(人權)을 장기간 유린하도록 방치한 당시 정보기관 및 국방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또 국방부와 공군, 관계당국은 공작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인권침해, 사체 미인도, 사망사실 미통지 등에 대해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유족 등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적절한 사과표명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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