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124] 1986년 한중관계 개선 비밀 프로젝트 ‘모란구상’ 내막
[그때 그 사건 124] 1986년 한중관계 개선 비밀 프로젝트 ‘모란구상’ 내막
  • 윤광제 작가
  • 입력 2018-07-16 08:48
  • 승인 2018.07.16 08:48
  • 호수 1263
  •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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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홍콩 주재 韓총영사관·신화통신 홍콩지사 ‘군산항 채널’ 가동
韓, 외교공관 통해 對中 ‘탐색전’… 中도 관계 개선 가능성 열어놔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미수교 상태였던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모란구상’이라는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군산항 채널’이라는 비공식 소통로를 가동하는 등 다각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사실이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 지난해 4월 11일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 한반도 긴장 완화 방안으로 한국과 중국·소련, 북한과 미국·일본이 서로 관계 정상화를 이루는 ‘교차수교’를 추진했다. 이를 위해 대(對)중국 접근에 많은 외교력을 쏟았다.
 
소련과 북한의 관계 긴밀화를 활용해 중국을 견인하는 방안이 한미 사이에 논의되는가 하면, 중국 관영언론인 신화통신이 한·중의 비공식 채널 역할을 하는 등 국교가 없는 양국 사이에서 다양한 ‘우회로’ 탐색이 이뤄졌던 상황이 외교문서에 생생히 나타나 있다.
 
1980년대 중반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각종 신무기를 도입하는 등 북·소 관계가 부쩍 긴밀해지자 중국은 이에 우려를 드러내며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높이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과 미국은 이런 상황을 외교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모란’ 구상이라는 이름 아래 1986년 초부터 협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6년 5월 조지 슐츠 미국 국무장관의 방한을 계기로 외무부가 작성한 ‘한미 외무장관 회담 별도 자료’의 ‘모란’ 구상 협의 경과(2급 비밀문서)에 따르면 논의의 발단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의 1985년 11월 중국 방문이었다.
 
중국 측이 북한과 소련의 관계에 우려를 보이며 ‘미국이 대북관계에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경우 중국도 대(對)한국 (관계) 관련 문제를 더 검토할 용의가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키신저는 방중 당시 덩샤오핑(鄧小平)의 요청으로 정치 문제에 대해 남·북한이 양자 회담을 하고 군사·안보 문제에 대해 남·북·미·중이 4자 회담을 하는 2개 회담 구상을 제시하기도 했다.
 
리처드 워커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키신저의 방중 결과를 1986년 1월 한국에 전달하면서 중국의 태도 변화를 활용할 방안에 대해 한미 간 협의가 시작됐다. 한국은 그해 3월 20일 ‘모란’으로 명명한 구상을 미국 측에 전달하며 견해를 타진했다. 이 자료에는 ‘모란’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들어 있지 않다.
 
다만 이상옥 당시 외무차관과 데이비드 램버트슨 당시 주한 미국대사관 공사가 북한 학자의 미국 입국, 사교 행사에서 미·북 외교관 접촉 등 ‘작은 조치’부터 생각해 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으며, 한국 측은 중국과 직접 교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언급이 있다.
 
이런 점에서 ‘모란’ 구상은 북한을 의식하는 중국이 한국과의 교류에 응하게 하도록 미국이 북한에 다소 유연한 태도를 취한다는 취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논의 초기 미국이 ‘북한의 군사활동 축소를 전제로 한 한미 팀스피릿 훈련 변경 가능성’을 검토하자는 제의(1986년 1월 21일)를 해 한국이 강력하게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1986년 1월 23일 방한 중이던 윌리엄 셔먼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와 이원경 당시 외무부 장관의 ‘면담요록’을 보면 이 장관은 “북한이 오판하지 않도록 강한 신호를 보내야 할 것”이라며 팀스피릿 훈련 조정이 불가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셔먼 부차관보는 “이제는 보다 광범위한 선택을 두고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할 때”라며 한국에 융통성 있는 태도를 주문했다. 셔먼 부차관보는 워커 대사에게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의 제의를 전하도록 지시(훈령)을 내렸는데 접견이 이뤄지지 못했다며 미국 측이 다소 ‘당혹’(perplexed)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식 외교 채널이 없던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과 중국 신화통신 홍콩지사가 이른바 ‘군산항 채널’로 불리며 의사소통의 창구 역할을 한 상황도 당시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드러났다.
 
군산항 채널의 물꼬를 튼 것은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이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표류한 사건이었다. 중국 측의 요청으로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와 신화통신 홍콩지사 외사부장이 접촉을 한 것이다. 이후 양측은 상시접촉 채널로 발전, 여러 차례 오찬과 만찬을 하며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자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예로 1986년 외교문서를 보면 그해 2월 말 열린 만찬에서 신화통신 측은 우리 총영사관을 통해 당시 중국 공군 조종사의 망명 사건과 관련한 최종 결정을 1∼2개월 연기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특히 양국은 이 채널을 통해 갈등과 오해를 푸는 데 주력했다.
 
1986년 11월 김일성 주석의 사망설이 돌연 제기되자 김재춘 당시 한국 총영사는 12월 초 신화통신 측과의 오찬에서 “한국이 발설한 것으로 일부 중국 지도층이 오해하는 것 같은데 그 소문의 출처는 일본이며, 한국 정부에서는 국민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그런 소문이 있었음을 알린 것뿐”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1986년 9월 중국 동북지방인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 총영사관을 설치하자,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이 배경을 탐문하기도 했다. 홍콩을 통한 한·중 접촉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의 광둥 대신 선양에 영사관을 설치했다는 점에서였다.
 
미중 수교(1979년)의 여파가 남아있던 전두환 정권 초반에도 우리 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탐색전’을 벌였으며 이 정황은 1981년 외교문서에 적시됐다. 우리 정부는 각국 주재 대사관을 통해 중국 외교의 동향을 파악하고 중국 측과의 접촉면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1년 3월 30일 자 외교부 문서에 따르면 주일 한국대사관은 제3국 리셉션 등에서 한국 외교관과 악수하거나 인사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제3국 대사주최 외교단 만찬에 한국대사와 함께 참석해도 무방하다는 중국 외교부의 내부 지침을 확인해 보고했다. 한국의 접근 시도에 중국은 한·중관계 개선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이를 위해서는 남북관계 발전이 선행돼야 한다는 태도를 보였다.
 
주일 한국대사관의 1986년 9월 5일 보고서에 따르면 타오빙웨이 당시 중국 외교부 국제문제연구소 아태연구실 주임은 그해 8월 29일 일본 국제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북중관계 관련 학술간담회에서 “중국(중공)은 남북한 대화 진전을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남북한 관계 호전 시 중국의 대한(對韓) 관계 발전이 가능하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간담회를 계기로 한국대사관 직원과 만나서는 중국이 참가하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이 성공할 경우 중국의 대한국 관계도 ‘진일보’할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