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그해(1301년) 가을. 제자의 성취를 대견하게 지켜보고 있던 스승 권부는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을 만나 제현과 난이 두 사람의 혼사 문제를 협의했다. 혼인 기일은 한가위 추석 명절을 지내고 한 달 후로 쉽게 조정이 되었다.
드디어 구월 보름날이 되었다.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졌고 혼인잔치는 저녁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현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윤혁(尹奕)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를 썼다.
한 번 잔치에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
네 술잔 올려 두 집 어른께 축수하네.
앞뒤로 양보하며 선관(蟬冠, 고관)들이 옹위하고 남북으로 맞으니 일산(日傘)들이 분주하네. 

혼례식을 올린 후 신부 집에서의 첫날밤이었다. 
혼인 의례가 마무리되자 마침내 두 사람은 신방으로 들어갔다. 홍사 휘장이 화려하게 드리워진 신방에는 나울거리는 황초 불이 켜져 있었다. 연지 곤지를 찍고 색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난이는 그야말로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자색은 백화(百花)의 영묘(靈妙)한 자태처럼 빛났고 문틈으로 스며든 달빛에 반사되어 보화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새신랑이 된 이제현은 천지신명님께 한없이 감사했다. 난이를 세상에 있게 해준 것과 난이가 자신의 여자가 된 것을. 이제현에게 난이는 마지막 사랑을 맹세할 수 있는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해 합환주(合歡酒)를 마셨다. 합환주는 생명의 결합을 상징한다. 술은 천지대자연의 정화이며 생명의 정액이다. 그것을 나누어 마심으로써 두 생명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홀연 그윽하고 정다운 두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난이, 미생지신(尾生之信)의 약속. 변치 않으리다.”
“서방님, 이젠 두루미목을 하지 않아도 되어 행복해요.”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오(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해요(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나는 난이가 없으면 날 수 없는 비익조의 운명이오…….”
“소녀는 서방님이 없으면 시들어 죽는 연리지의 운명이지요…….”
두 신랑 신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는 밤이 샐 줄 몰랐다.
“난이, 인생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괴롭고 견디기 힘든 무서운 것이오.”
“서방님,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어도 서방님과 함께하면 두려울 게 없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현은 황초 불 아래서 황홀하게 난이를 바라다보다 문득 비장감에 젖어 말했다. 
“대개 천하 만물로 생명이 있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이 없소.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고(人命在天 인명재천),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이 덧없소(人生如朝露 인생여조로). 이 같은 유한한 세상에서 소중한 인연을 얻어 우리는 부부로 맺어졌소.”
“우리 두 사람을 하나로 맺어준 부처님께 감사드려요.” 
“장부의 큰 삶이란 ‘널리 베풀어 뭇 사람을 구제한다(博施濟衆 박시제중)’는 뜻을 펴는 데 있다 하였소. 나는 미력하나 병화(兵火)에 찌든 조국을 재건하고, 만백성을 도탄에서 구하고, 고구려의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 한 목숨을 바칠 생각이오.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생, 죽어 천년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함께 잘 가꾸어 갑시다.”
“예, 서방님이 가는 길을 잘 내조하겠어요.”
두 사람의 정담은 그칠 줄 몰랐다. 밤은 깊어 화촉동방(華燭洞房, 신랑 신부가 같이 자는 방)의 호롱불은 꺼졌다. 합환주에서 우러나오는 감미로운 향내음은 진하게 목젖을 자극했다. 난이의 겉저고리는 부드러운 신랑의 손길이 닿자 힘없이 사르르 풀렸다. 아름답고 지고지순한 침묵의 사랑행위가 신방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첫 입맞춤, 첫 교합, 첫 탄식. 그들의 결합은 마침내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했다. 두 청춘의 알몸은 연한 지느러미를 가진 날렵한 물고기가 대양을 헤엄치듯, 한 쌍의 원앙이 봄날의 찰랑찰랑한 연못을 노닐 듯, 열반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 쌍의 원앙을 시새우는 첫날밤은 밝아오는 여명 앞에 자리를 내주었다. 멀쩡했던 신방의 문종이가 이웃들의 ‘신방엿보기’ 의식으로 여기저기 침을 발라 구멍을 뚫은 관계로 뻥뻥 뚫려 있었다. 달콤한 신혼 초례를 지낸 이제현은 감기는 눈을 부비며 다시 신부 집에 재행걸음을 했다. 동상례의 의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신부 측의 젊은 일가친척들과 마을 청년들이 우르르 장인 권부의 집으로 몰려와서 장사진을 쳤다. 그들은 신랑 이제현의 다리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는 ‘여기에 무엇하러 왔느냐’ ‘왜 색시를 도둑질해 가느냐’며 방망이로 발바닥을 때리며 놀렸다. 곤경에 빠져 있는 이제현의 당황한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변한국대부인은 어린 사위가 가여워 보였던지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내어 이들을 달랬다. 
이로써 권부와 이제현은 좌주(座主)와 문생(門生) 관계에 이어 장인과 사위 관계가 되었다. 권부의 집안은 아들과 사위 가운데 봉군(封君)된 사람이 아홉 명에 이르는 번성을 누린 명문가였다. 따라서 권부의 사위라는 위치는 부지불식간에 이제현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배경이 되었다.
한편, 이제현의 등과는 동갑내기 4인방 박충좌, 최해, 안축의 분발과 경쟁을 자극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다음해 부터 박충좌를 필두로 차례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리하여 개경 황도에는 ‘정해생 선비 4인’의 과거급제 성공담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기 시작했다. 
도원결의를 한 결발동문(結髮同文) 네 사람이 모두 등과를 하자 이들에겐 아주 조그만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4인방의 서열 자리매김이었다. 4인의 결발동문들은 그들 중 생일이 가장 늦었지만 제일 먼저 등과한 이제현을 첫째로 예우했다. 그리하여 이제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호(號, 익재益齋)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만큼 제배(諸輩, 같은 또래)가 이제현을 존중하고 어려워했다는 증좌이다. 그러나 이제현이 나중에 재상이 되자 사람들은 귀천(貴賤)할 것 없이 모두가 ‘익재’라고 칭하였다.
이처럼 이제현은 친구들 간에는 리더십이 뛰어나고 보이지 않는 카리스마가 있었으며, 백성들에게는 중망(衆望)을 받았던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지부상소(持斧上疏)

제 26대 충선왕은 부왕(충렬왕)이 총애한 무비를 죽였다. 
이는 모후인 제국대장공주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다. 이후 충선왕은 실의와 노여움에 빠진 부왕을 달래기 위해 자태와 용모가 아름다운 숙창원비(淑昌院妃) 김씨를 부왕에게 바쳤다. 숙창원비 김씨는 위위윤(尉衛尹)으로 있다가 물러난 김양감(金良鑑)의 딸로서 진사 최문(崔文)에게 시집갔으나 젊어서 과부가 된 이른바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다. 충렬왕은 비련의 주인공 숙창원비 김씨를 매우 사랑했다.
한편, 충선왕은 아버지의 여자가 된 숙창원비 김씨를 늘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가슴과 몸매, 백옥 같은 피부, 사람을 뇌쇄(惱殺)시키는 미소를 동경한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10년이나 흘렀다. 무신년(1308, 충렬왕34)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다시 복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숙창원비 김씨를 취한 것이었다. 충선왕은 김문연(숙창원비의 오빠)의 집에 가서 숙창원비 김씨와 관계를 가졌으며, 그를 숙비(淑妃)로 봉하여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패륜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충선왕은 정사는 내팽개치고 그녀와 노는 데만 열중하였다. 매년 10월 15일에 열리는 팔관회를 정지시켜 백성들의 큰 원성을 샀다. 그녀와의 사랑놀음이 국민적인 잔치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이 복위한 지 두 달밖에 안 되는 시점이라 신하들은 왕의 패륜에 대해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충간(忠諫)하려고 하지 않았다. 상소는 왕의 독재와 실정(失政)을 견제하기 위해 언로를 열어놓은 뛰어난 제도였지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1308년 10월 28일. 마침내 백관을 감찰 탄핵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을 맡고 있는 감찰규정(監察糾正, 감찰사에 속한 종6품) 우탁(禹倬)이 분연히 나섰다. 우탁은 홀로 죽음을 각오하고 소복을 입고 부월(斧鉞, 도끼)을 들고 짚방석을 짊어진 채 궁궐로 들어가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렸다. 그러나 왕의 곁에 있던 신하는 상소문을 펼쳐들고만 있을 뿐 감히 읽지 못했다. 조정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적만 감돌 뿐이었다.
그러자 우탁은 충선왕이 들으라고 신하들을 향해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은 근신(近臣)으로서 임금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건만, 임금의 패륜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악으로 인도하니 그대들은 그 죄를 아는가!” 
“…….”
우탁의 충의와 기개는 조정을 전율케 했다. 그의 서릿발 같은 노성(怒聲)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할 말을 잊은 조정 신하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움에 떨었다. 
우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목숨을 걸고 충선왕의 잘못을 극간(極諫, 끝까지 간함)했다.
군왕은 날마다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만고에 걸쳐 변할 수 없는 윤상(倫常,  인륜의 도리)을 무너뜨림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사옵니까? 전하께서는 부왕이 총애하던 후궁을 숙비에 봉했는데, 이는 삼강오륜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종사에 전례가 없는 폐륜이옵니다. 
숙비는 밤낮으로 갖은 아양을 다 부려 전하를 미혹하여 정사(政事)를 문란하게 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해서도 향연을 하는 등 절도가 없고 사치스러움이 도를 넘었사옵니다. 군왕이 나라의 흥망을 가늠하는 것은 오직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사옵니다. ‘신하는 간언을 할 때 목숨을 건다’고 했는데, 오늘 소신에게 터럭만큼의 잘못이 있다면 신의 목을 치시옵소서. 
전하, 바라옵건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간신들의 무리를 쫓아냄으로써 반드시 나라가 흥왕할 것(亡國之臣 追際必興 망국지신 추제필흥)’이라는 주자의 가르침을 따르시옵소서.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키시어 고려의 억조창생을 보살피는 성군이 되어 주시옵소서.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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