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고정현 기자] 자유한국당이 전례 없는 도전에 나선다. 한국당은 지난 17일 우여곡절 끝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김병준 교수를 추인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우클릭’을 지속해 오던 방향을 ‘180도’ 튼 셈이다. 보수 가치 재정립, 인재 발굴 등 다방면에 걸친 ‘대수술’이 예상된다. 다만 당내 계파 구도가 견고한 상황에선 그 어떤 방안도 효과를 보긴 어려울 것이란 지적이다. 한국당의 뇌관인 ‘계파’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비대위의 수술 자체가 헛수고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정작 김 위원장 입장에선 선뜻 칼을 뽑아 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비대위는 사실상 현 지도부의 작품이다. 친박계는 비대위원장 선출 과정이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음모라며 김성태 원내대표의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무턱대고 칼을 뽑아들 경우 친박계가 제기한 ‘음모론’을 비대위 스스로 증명해 주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미 친박계는 ‘분당’까지 불사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은 상황이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시작부터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 확 끌어안자니… 탁 내치자니… 양대 계파 사이 낀 김병준 號의 ‘딜레마’
- 親朴 ‘분당’ 으름장 놨지만… ‘구심점’ 없어 가능성 희박

 
자유한국당이 지난 17일 전국위원회를 열고 비상대책위원장에 김병준 국민대 명예교수를 의결했다.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궤멸 직전의 위기 속에서도 극심한 자중지란의 내홍을 겪고 있는 한국당이 갈등 수습의 전기를 마련할지 주목되고 있다.
 
김 비대위원장은 참여정부 시절 정책을 다룬 덕분에 문재인 정부의 정책 허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안보 정책과 경제·사회 정책 등에서 현 정부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대안을 제시해 한국당을 정책 정당으로 변모시킬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김병준 “다 같이 함께 가자”
당장은 그렇지만...
 

그러나 당 안팎에선 김 비대위원장의 추후 행보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당장 혁신 비대위의 권한을 두고 계파 갈등이 다시 터져 나올 수 있다. 김 권한대행 등 복당파는 오는 2020년 총선에 공천권을 가지는 ‘전권 비대위’를 거듭 강조하고 있지만, 친박계 등 잔류파는 공천권이 없는 ‘관리형 비대위’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김 비대위원장은 지난 18일 전국위가 끝난 후 기자들과 만나 “혁신 비대위가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남은 선거기간을 생각하면 공천권을 행사하기 힘들 것”이라고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했다.

만약 김 비대위원장의 말대로 비대위가 차기 총선 ‘공천권’이라는 칼자루를 쥐지 못하면 김병준 표 ‘수술’은 칼로 물 베기에 그칠 공산이 높다. 김 비대위원장이 ‘인적 청산’을 단행한다 하더라도 이는 총선 직전 ‘공천권’을 거머쥔 새 지도부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대위가 공천권을 가진다 해도 문제는 남아 있다. 김병준 비대위는 한국당 내 입지가 전무하다. 과거 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사례처럼 지도부 등 당내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출범한 비대위도 아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무턱대고 칼을 휘두른다면 친박계는 ‘비대위=복당파의 칼’이라며 들고일어날 게 자명하다.
 
아직까진 김 위원장과 친박계 모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 내부에서 세력이 전무한 김 위원장으로선 당내 입지를 구축하는 게 우선이고, 반면 친박계로선 이미 공감대가 확산된 비대위에 섣불리 반기를 들었다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대위에 대한 권한, 인적 구성, 운영 방향 및 시기 등 내용이 구체화되는 시점에는 친박계가 관망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가 바로 비대위가 처한 현실적인 딜레마다. 비대위의 제1 과제인 ‘인적 청산’ 문제에 전혀 손을 대지 않자니 비대위의 혁신 작업 전체가 흐지부지될 공산이 크고 반대로 비대위가 청산 작업에 착수하자니 친박계의 결사항쟁이 예상되는 탓이다.
 
김 비대위원장이 지난 18일 기자회견에서 ‘당 혁신’을 강조하면서도 ‘설득’이라는 카드를 내민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태 원내대표의 ‘단호한 대처’와는 온도 차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비대위 활동 기간을 두고 입장 차가 있는데 대해 “제가 가서 그분들과 대화하겠다. 지금 당의 기치와 깃발을 세우는 게 먼저인지, 새 리더십 등장이 먼저인지에 대해 (반발하는 의원들과) 이야기해서 최대한 동의를 구해보겠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인적 쇄신 과정에서 ‘교체 대상’으로 거론될 인사들에 대해서도 “새롭게 세워진 당 가치나 이념 체계, 정책 로드맵에 따라 만든 시스템에 의해 같이할 분과 그렇지 않을 분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라면서도 “(다만) 될 수 있으면 가려지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고, 다 같이 새로운 혁신과 기치의 깃발을 들고 미래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친박, 수술대 올라가느니
‘분당’… ‘구심점’은 누구?

 
김 비대위원장이 이처럼 ‘당근책(?)’을 내놨지만 사실상 비대위가 현 지도부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비대위의 ‘친박 청산’은 필연적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지선 참패 이후 한국당 내홍 사태의 본질은 지선 책임론이 아니었다. 계파 간 정치적 생명을 건 싸움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승리하는 쪽이 불과 2년도 남지 않은 2020년 총선의 공천권을 거머쥐기 때문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친박계는 당내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국민적 지지도 바닥을 쳤다. 결국 친박계에겐 지방선거 참패가 부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친박계는 복당파로 분류되는 현 지도부에 ‘지선 참패 책임론’ 프레임을 씌우면서 새 판을 꾸리고자 했다.
 
반대로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당내 주류세력으로 등극한 김성태 원내대표 등 복당파 입장에선 ‘최대 위기’였다. 지선 참패 책임을 지고 홍준표 전 대표가 물러난 마당에 자칫 친홍계 전체가 와해될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 원내대표 등 복당파가 친박계가 주장하는 조기 전당대회를 반대하는 것 역시 지선 참패 후폭풍이 잦아들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복당파는 비대위 구성에 성공했다. 복당파가 비대위의 칼을 빌려 친박계를 내치는 일종의 ‘차도살인(借刀殺人)’전략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해 친박계의 한 중진은 지난 4일 기자와 만나 “근본적으로 비박계가 세력화를 꾀하고 있는데 용납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어 “비박계가 비대위를 거쳐 전당대회까지 다 먹으려고 하고 있다”며 “맘에 안 드는 친박들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다 해부하려고 할 것”이라고 했다. 다른 친박계 의원도 “김무성 의원이 ‘징검다리 비대위’를 건너 당대표에 나선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고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친박계의 ‘분당’ 가능성까지도 점쳐진다. 이래도 저래도 죽는다면 자진 탈당을 선택하는 쪽이 미래를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친박 중진인 홍문종 의원은 지난 6월 28일 의총에서 ‘분당’을 언급했다.

그는 “이제는 친박, 비박으로 계파를 나누지 말고 이념으로 나누자”며 “안 되면 분당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치열하게 당 노선을 토론하고 그래도 분열이 계속되면 차라리 갈라지는 것이 낫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하지만 비박(비박근혜)계가 주도했던 2년 전 바른정당 창당 때와 달리 분당을 주도할 만한 ‘친박 구심점’이 없어 분당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는 관측이다. 새누리당·바른정당 분당 사태 당시에는 김무성, 유승민 의원이라는 대표적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친박계는 그때와 사정이 다르다.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의원은 탈당했고, 핵심인 최경환 의원은 1심 판결을 받았다. 홍 의원 본인도 “지금 친박은 다 죽었다”고 자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른정당이 여전히 정치적 기반을 다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친박계의 분당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한 한국당 의원은 “밖에 나가서 고생한 걸 다들 아는데 누가 또 나가려고 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결국 친박계가 현실적 상황을 감안해 분당보다는 당내 투쟁을 선택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 되는 모양새다.
 
친박계 핵심 인사는 한 언론사와의 통화에서 “당내 친박계의 계파세가 예전에 비해 확연히 축소된 것은 사실인 만큼 비대위의 혁신 작업이 흐지부지되는 선에서 끝나거나, 반대로 분당 사태 직전까지 가는 내홍 대폭발이 발생하는 등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닌 방향으로 결론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술 성공 시 바른미래 ‘붕괴’
‘중도 보수 대통합’ 가능성

 
하지만 만약 비대위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칠 경우엔 ‘한국당發 정계 개편’도 꿈만은 아니다.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의 고공행진과 반대로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답보(踏步)에 빠진 상황에서, ‘원조 친노’ 인사인 김 위원장의 ‘중도 지향 개혁’이 양당 통합의 명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김 위원장의 ‘개혁’ 방향은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와 상당 부분 결을 같이한다. 유승민 전 대표는 지난 2016년 성균관대 초청 특강에서 “시대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반공’만으로는 안 된다”며 “헌법 가치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보수”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지지율을 반비례 관계로 분석한다. 한국당의 지지율이 상승할 경우 바른미래당의 지지율은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만약 김 위원장이 한국당을 중도 보수 정당으로 탈바꿈시키고 나면, 이 같은 현상은 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그렇게 되면 바른미래당은 자연히 붕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미 바른미래당은 한국당 못지않은 내홍을 겪고 있다. 지선 참패 이후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지만, 국민의당 출신과 바른정당 출신 간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한국당이 혁신에 성공한다면 ‘영·호남 통합’이라는 정치 실험의 희생양이 된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로서는 ‘복당의 유혹’을 이겨내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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