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을 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학문이라는 게 널리 이로운 것이 돼야 한다면, 학자는 책 속에만 파묻혀 있지 말고 세상으로 나와 만인의 고통에 답해야 한다. 그렇기에 학자가 정치에 뛰어드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소신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념과 철학으로 꿋꿋이 버텨 내는 게 학자의 본분이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그랬다.  

우리나라 보수당이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이 침몰한 당을 구해줄 인물로 김병준 전 국민대 명예교수를 혁신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어이없다. 얼마나 사람이 없었으면 진보진영 인사를 보수당의 수장으로 모셨을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진보 흉내를 내서라도 당이 다시 일어서기만 한다면 된다는 것인가.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말인가. 그것이 보수의 가치인가.

김병준, 그가 누구인가. 정체 불명의 학자다. 학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만큼은 확실해야 한다. 지나온 그의 행적을 보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었다. 진보가 어려울 때 불러주면 거길 가고, 보수가 어려울 때 불러주면 거기에 가는, 좋게 보면 ‘경륜 기부’이고 현실적으로 보면 ‘권력 지향’적 행보다. 

진보 정권에서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 등 요직을 역임한 그는 2016년 박근혜 정권의 국무총리직을 수락했다가 야당의 반대와 이어진 탄핵정국으로 낙마했다.

그는 같은 해 진보 정당이던 국민의당으로부터도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가 당 중진들의 반대로 현실 정치권 진입에 실패했다. 그는 “과거에 청와대와 정부에서 일해 봤던 사람으로 학자로서 국민의당에 재능기부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던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6·13 지방선거에 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줄 것을 제의받았으나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늦은 게 아니라 승산 없는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더욱 만신창이가 된 한국당에서 SOS를 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개선장군’처럼 입성했다. 마침내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데 성공한 것이다.

좋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 됐건, 기왕에 한국당을 맡았으니 과거지사 다 잊고 잘해 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그가 지금 하고 있는 행태를 보라. 황망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한 국회의원의 말에 “노무현 정신은 여기도 대한민국, 저기도 대한민국이다”라고 받아쳤다. 이념을 통합하겠다는 말인지,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더욱이 보수당에 와서 ‘노무현 정신’을 거론하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런 그가 이제는 한국당에 ‘신보수 가치’를 심겠다고 공언했다. ‘노무현 정신’을 한국당에서 계승하는 게 신보수 가치인가.

한국당에 가기 하루 전날엔 바른미래당 인사들을 만나 “다시 모여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통합을 말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신보수 가치’에는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주군에게 비수를 꽂은 뒤 당을 박차고 나간 자들과 합치는 것도 포함돼 있나 보다. 레토릭만 장황했지 정작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뭉개버리는 게 신보수인가. 그래서, 그런 그들과 합쳐서 무엇을 도모하겠다는 건가. 한국당을 손에 넣고 바른미래당마저 흡수한 뒤 대권이라도 꿈꿔보겠다는 건가.

이념도 불분명하고 권력 욕구가 강한 학자가 한국당에 온 사실도 문제지만, 그런 인사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한 한국당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한국당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무이념 정당’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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