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 유동성 위기 몰려 서산간척지 매물로 내놓아 법인 설립영농법인엔 부담 줄이고, 도시민에겐 자연 벗삼을 수 있는 기회1984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서해안 일대의 지도를 바꾼 ‘사건’이 있었다. 천수만의 물길을 막아 충남 서산의 육지지도를 4,661만평이나 늘려놓은 것이다. 일명 ‘정주영 공법’이라 불려지는, 유조선을 활용한 물막이공사가 바로 이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고철덩어리였던 워터베이호를 가라앉혀 물살을 막고, 즉시 바위를 투하시켜 뭍으로 만든 땅. 서산간척지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지금 서산간척지는 새 주인을 맞기 위해 분양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간척지는 몇년 전까지 현대건설 소유였으나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로 간척지를 매각한 후 본격적인 일반인 분양이 시작된 것이다.현재 서산간척지는 A, B 두개지구로 나누어진다. 둘레는 A, B 지구 각각 60km, 50km로 지프를 타고 달리는데 각각 2시간씩 걸린다고 한다. 농지와 담수호 등을 모두 포함한 전체 매립 면적 4,661만평 가운데 논 면적은 3,061만평(1만121ha)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 벼 재배면적(113만8,408ha)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79년 현대건설이 정부로부터 충남 서산, 태안, 홍성 일대를 두루 걸치고 있는 천수만 매립면허를 따내고 84년 비로소 착공에 들어간 이후 줄곧 현대건설 소유였으나 현대건설이 유동성위기를 겪으면서 소유자가 혼재하고 있다. 지난 2000년 현대건설이 부도사태를 맞아 간척지를 매물로 내놓은 결과다.큰 줄기의 소유주를 보면 현대건설과 7개 영농법인, 피해농어민 등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현대의 경우 750만평을 보유하고 있으나 현대서산영농법인에 농사를 위탁했다. 현대서산영농법인은 당초 법인이 소유하고 있던 130만평까지 보태 총 880만평에 농사를 짓고 있다. 간척지 전체 농지 면적(3,061만평)의 30%에 해당하는 넓이다.단일 영농법인으로서는 가장 넓은 농지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서산영농법인은 2000년 12월에 설립됐다. 법인명 앞에 ‘현대’라는 브랜드가 붙여진 것은 법인의 인적구성이 현대건설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2000년 11월 당시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몰리자 자구책의 일환으로 서산간척지를 매물로 내놓은 것이 법인 설립의 발단이 됐다. 당시 현대건설 서산영농사업소 부소장이던 윤석용(49) 현대서산영농법인 대표가 아예 매물 중 일부를 사들이기로 마음먹고 직원들과 쌈짓돈을 털어 영농법인을 세운다. 이때 참여한 동료 직원들은 59명. 130만평을 매입하는 데 필요한 325억원은 직원 출자금에 90억원의 투자유치금을 합해 마련했다.사업 초기 우려도 있었으나 조합은 상당한 흑자를 내고 있다. 법인 설립 2년만에 대출금 90억원을 모두 상환했을 정도다. 그러나 주주이자 직원들은 배당은 고사하고 월급도 일률적으로 250만원으로 동결했다. 자사 소유농지를 130만평에서 400만평으로 늘릴 때까지 회사 유보금을 충분히 쌓아두자는 직원들의 자발적 결의의 산물이다.서산간척지에는 현대영농조합법인과 같이 희망적이고 성공적인 스토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근 주민들은 간척지 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이 위협받고 결국 현대건설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간척지 조성 공사가 황금어장이었던 천수만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와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던 어민들이 집단 반발을 한 것이다. 어민들은 현대건설을 상대로 올해로 24년째 소송을 진행 중에 있다. 처음 소송에 참여한 가구 수만 1만4,310세대. 지루한 소송 끝에 지금은 1만4,210가구가 해결을 봤다. 그러나 남은 100여 가구들은 아직도 소송 계류 중에 있다.현대건설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거나 합의를 본 농어민들은 이달 초부터 할인된 가격에 농지 매입을 시작했다. 현대가 농어민들에게 약속한 땅은 1,450여만평. 평당 1만7,000원부터 2만3,000원까지, 가구당 1,500평씩 분양한다. 이 가격은 2000년 현대건설이 일반 분양할 때 평당 가격 2만∼2만6,000원보다 약 12% 가량 할인된 것이다.분양이 끝나면 농민들은 이제 전업농이 될 것인지, 농지를 매각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3년전 일반분양을 받았던 7개 영농법인조합원들이 도시민들에게 분양에 나선 것을 보면 상황이 비슷하기 때문이다.서해안, 송악, 대양, 철원 등 서산간척지내 영농법인조합들은 일반분양을 받았던 사람들이 만든 단체다. 이들 법인들은 또다시 분양을 시작했다.이번 분양은 단순한 농지장사가 아닌 ‘위탁 농업’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조합은 도시민들에게 개인당 300평 이하 농지를 분양한다. 농지를 분양 받은 도시민들은 직접 농사를 지을 여건이 되지 않아 영농법인에 농사를 위탁한다.한 영농법인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자녀들과 함께 자신이 소유한 농지에서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산교육이 될 것이다.”평당 분양가는 4만3,000원이다.

과거 분양가보다 2만원 가량 비싼 가격이지만 분양을 받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 혜택이 있다. 텃밭이나 유실수가 제공되고 찜질방을 이용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농지 지주이면서 영농법인의 회원이 되는 셈이다.영농법인 입장에서는 WTO체제 하에 농가 몰락이 우려되는 이때 전업농으로서 부담을 덜 수 있고 도시민들은 전적으로 농사에 생계를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자연을 벗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좋은 일이라는 게 영농법인 관계자의 설명이다.서산간척지는 수 차례 주인이 바뀌고, 지금도 바뀌고 있는 과정에 있다. 그 와중에도 농사는 이루어지고 열매를 맺어왔다. 생태 학습의 현장으로서 도시민과 농촌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게 된 서산간척지. WTO시대에 새로운 농업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서산 간척지 피분양시 유의사항

7개 영농법인들이 서산간척지를 분양하며 내건 취지는 긍정적인 면을 많이 담고 있긴 하나, 분양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몇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선 올초 개정된 농지법을 정확히 숙지해야 본의 아니게 입을 수 있는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개정된 농지법상 직접 영농 규정을 살펴보면 전업농이 아니더라도 300평 미만의 농지를 구입할 수는 있으나 위탁 영농을 할 경우 농사일의 3분의 1 이상에 참여해야 한다. 또 직접 영농을 인정받으려면 1년에 30일 이상을 일하도록 돼 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는 있다. 영농법인들은 소유주가 농업현장을 찾아 가족 차원에서 견학을 하거나 ‘실습’을 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지만 서산시는 엄밀한 차원의 ‘근로’ 내지 ‘노동’으로 해석하고 있다. 서산시는 “피분양자들이 법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농지법 위반시 농지 처분 명령을 받게 될 수도 있다”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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