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고려화학(KCC) 정상영 명예회장과 현대엘리베이터 현정은 회장 일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는 루비콘강을 건너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그동안 현 회장과 적과 아군의 경계선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왔다. 그러나 이젠 정 명예회장 스스로 피아 구분을 명확히 했다. 그동안 KCC와 정 명예회장이 현대지분을 매입하며 내세운 명분은 ‘외부 M&A 세력으로부터 현대그룹 경영권 방어’였으나 이 명분은 급격히 퇴색하고 있다. 바야흐로 고 정주영 창업주가 일으킨 현대그룹이 동생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다.

지난 14일,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정 명예회장과 현회장 일가가 벌이던 막후 경영권 암투는 사실상 정 명예회장의 승리로 끝났다.이날 KCC는 현대에 대한 M&A 성공을 선언하면서도 “M&A 위협으로부터 현대를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현정은 회장 일가가 경계심을 풀지 않은 상황에서 사모 펀드까지 동원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한 것은 M&A가 갖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성격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점은 5% 이상 지분을 매입할 경우 공시의 의무를 갖는다는 ‘지분변동 보고의무’ 위반 논란과 함께 비난 여론의 직접적 구실을 제공했다.

이에 대해 KCC와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인수 명분으로 ‘현대그룹의 정통성’ 유지를 들고 있지만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을 청산할 수도 있다고 말해 정통성 논란을 더욱 부채질했다.현대그룹이 KCC에 편입될 상황에 맞닥뜨림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큰 사건을 예고하고 있다. 첫 번째는 현대그룹 정통성의 상징이었던 대북사업이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김재수, 김윤규 사장 등 옛 MH파 가신들이 퇴진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증권가 관계자들은 KCC가 알짜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풍부한 수익은 취하되 현대아산과 같은 무수익에 가까운 사업은 접을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제부터 철저한 기업논리(=이익추구)에 의해 현대가 움직일 것이라는 얘기다.

사실 현대는 고 정주영-정몽헌 회장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승계의 정통성을 대북사업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대북사업의 필요성을 운운하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제는 KCC로 인해 대북사업 중단의 명분이 제공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현대가 KCC를 비난하는 요소로 정통성(대북 사업)과의 단절을 들이댔던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측면이 아닐 수 없다.KCC가 현대를 눈앞에 두고 현대그룹 역사에 남을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사건’은 옛 MH 가신들의 퇴진이다.지금까지 정 명예회장과 KCC가 했던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김재수 구조본부장,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등 왕자의 난 당시 MH를 지원했던 가신들은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 확실시된다.

불과 3∼4년 전까지 국내 최대 그룹이었던 현대그룹의 영광과 추락을 이끌었던 장본인들의 퇴진은 현대 역사의 주요 사건이다.샐러리맨의 꿈이었던 이들 가신그룹은 비단 현대그룹 뿐 아니라 현대산업개발, KCC, 성우그룹, 한라그룹 등 방계그룹 오너들과 미묘한 갈등 기류를 형성해왔던 게 사실. 단적인 예로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이 과거 현대자동차를 정몽구 회장에게 넘겨준 내막에는 현대그룹 가신들이 정주영 회장의 의중을 흔들었다는 것이 그룹 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형제들은 정주영 회장 주변의 가신그룹에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KCC가 현대 인수를 마무리할 경우 확실시되는 이들 가신들의 퇴진은 과거 MK 계열 가신들이 살아남은 것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미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MK와 함께 현대자동차로 밀려난 가신들은 2000년 왕자의 난이 끝날 때만 해도 ‘패배자’로 인식됐었다.사실상 공정위의 승인만을 남겨둔 KCC의 현대그룹 인수는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을 제외하고는 현대그룹의 근간이 사라진다는 점에서 재계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기록했다는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정상영 명예회장과 KCC가 현대그룹 인수를 계기로 어떤 스타일의 경영을 추구해 나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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