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들이 그룹 경영권과 재산 등을 편법으로 증여 또는 상속하기 위해 주로 활용해온 특혜성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신주인수권을 포기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 12월8일 동양그룹의 현재현 회장이 자신이 보유 중이던 해외BW의 신주인수권(warrant)을 전량 무상 소각한 데 이어 17일에는 효성그룹과 현대산업개발 대주주들이 신주인수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참여연대는 대주주들의 신주인수권 포기를 환영하면서도 “발행경위에 대한 진상공개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하며, 이와 관련한 금융감독기관의 조사 및 제재조치 결과를 주목할 것”이라고 밝혔다. 재계에서는 최근 잇따라 벌어지고 있는 대주주들의 신주인수권 포기가 삼성 이재용 상무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에 대한 검찰 기소에 주목, 화근의 싹을 자르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이재용 상무의 경우 검찰이 혐의 사실이 부족해 기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난무했으나 결국 기소가 이루어져 재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사건으로 남게 됐다. 재계는 이재용 상무와는 방법적으로 차이가 있으나 편법으로 경영권을 상속하기 위해 신주인수권을 이용했다는 의혹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삼성의 검찰 수사가 법학 교수들의 고발과 함께 시민단체의 강력한 의혹 제기로 이루어진 만큼, 시민단체의 표적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게다가 내년 주주총회가 3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예상되는 시민단체의 공세를 애초에 피해야 한다는 긴박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최근 가장 먼저 신주인수권 행사를 포기한 동양그룹 현재현 회장의 경우, 지난 99년 말부터 2000년 초에 매입한 BW 291만4,654주에 리픽싱 조항을 삽입해 두 차례에 걸쳐 행사가를 조정해 BW를 470만9,250주로 크게 늘렸다.

또 행사하지 않은 신주인수권 모두를 행사하게 되면 13. 83% 지분율이 22.35%로 증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리픽싱(Re-fixing) 옵션(행사가조정규정)이란 당초 매입했을 때 주식 가치보다 떨어질 경우 신주인수 행사가격이나 주식 전환가격 등이 자동으로 낮아지는 규정이다. 리픽싱 옵션이 붙어 있는 주식을 보유한 사람에게는 주식 변동에 따른 위험이 없다. 지배주주 일가가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우 유용한 옵션조항인 셈이다.지난 7월 참여연대에 의해 대주주 일가의 편법 지분 확대 의혹이 제기된 동양그룹과 현재현 회장은 12월8일 470만9,250주의 해외 BW의 신주인수권을 전량 무상 소각했다. 동양그룹은 의혹이 제기됐을 때 “지난 99년 12월15일 당시 주가가 4,500원이었는데 현재현 회장은 주당 6,000원에 권리를 행사해 오히려 1,500원씩 손해를 봤다”며 편법으로 지분을 늘리려 한다는 참여연대의 의혹을 부인해왔다.

효성그룹도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인 현준씨, 현문씨, 현상씨 등이 가지고 있는 신주인수권에 리픽싱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신주인수권을 모두 행사할 경우 지분율이 13.64%에서 24.57%로 상승할 수 있었다. 참여연대는 동양과 비슷한 의혹을 제기하며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은 일부 BW를 주당 618∼700원에 인수해 회사의 자금조달에는 거의 기여하지 않고, 단지 자신들의 지분 상승 효과만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참여연대의 압박과 금감원의 조사에 부담을 느낀 효성그룹은 지난 12월17일 공시에서 대주주 일가가 보유하던 신주인수권 547만5,324주(17.3%)를 전량 포기한다고 밝혔다. 가격으로 치면 3,482만달러(414억원)어치에 달했다. 효성측은 “대주주가 용단을 내려 시장의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하고 주주 권익 보호와 기업 신뢰도를 높였다”며 의미를 부여했다.현대산업개발의 정몽규 회장은 지난 5월 참여연대에 의해 해외BW에 대한 의혹이 제기된 후 두 차례에 걸쳐 신주인수권을 소각한 케이스.

참여연대는 지난 5월 “정몽규 회장이 99년5월과 7월에 각각 발행된 해외BW의 85%와 50%를 발행 직후 매입했다”며 “신주인수권 모두를 행사할 경우 종전의 지분 9.7%에서 31.5%로 크게 확대된다”며 편법 지분 확대 의혹을 제기했다.현대산업개발은 참여연대의 의혹 제기에 이어 금감원 조사가 시작되자 크게 위축되기 시작, 지난 7월에는 신주인수권 중 일부인 374만주를 소각하면서 남은 물량에 대해서는 시가에 근접한 1만293원으로 올렸으나 참여연대로부터 전량소각을 요구받았다. 현대산업개발과 정몽규 회장은 지난 12월17일 남은 물량 983만주(13.0 5%)에 대해서도 전량 소각하겠다고 밝혔다.동양, 효성, 현대산업개발 외에도 웅진닷컴의 윤석금 회장이 지난 12월2일 신주인수권 중 상당 부분을 포기하기도 했다. 웅진닷컴의 경우 BW가 주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윤 회장의 신주인수권 행사 가능 주식수는 총 436만3,636주였으나 이중 150만주는 경영권방어 차원에서 신주인수권을 행사하고 잔여수량 286만3,636주는 무상으로 권리를 포기했다.재벌의 편법적인 부의 축적 또는 경영권 확보를 위해 자주 활용돼오던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이 이제는 근절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사법당국까지 이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참여연대는 최근 잇따른 재계의 신주인수권 포기를 환영하고 있다. 점진적으로 재계가 투명성을 확보하게 되는 계기가 속속 마련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참여연대는 재계를 향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논평에서 “일단 해당 지배주주들이 무상소각 조치를 취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환영하지만, 이러한 특혜 시비를 스스로 제거하지 못하고 문제제기 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경영권 안정은 경영투명성을 제고하고 시장의 신뢰를 확보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신주인수권 포기에 대한 최근 분위기에 대해 재계의 한 관계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주주들의 편법적인 신주인수권부사채 발행은 근절돼야 마땅하겠지만 M&A 위협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측면을 이해해주길 바란다”며 재계의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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