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6개월짜리 단기 석사장교로 겨우 병역 마쳐
“병역 기피 수단”‧‘육개장’이라는 은어까지 만들어져

 
‘울보 정치인’, ‘듣보잡’, ‘모두까기 인형’ 등으로 불렸던 대선 주자 A정치인은 지난해 3월 한 인터넷신문 주최 B정당 대선예비후보 토론회에서 느닷없이 “네 후보가 범죄 경력 법원판결문과 병역증명서, 재산증명서를 당과 국민 앞에 공개 제출하자”라고 제안하고 나섰다.
 
“범법자 대통령이 나와서는 안 된다”라는 취지라고 설명했지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감옥에 다녀온 C후보나 ‘전과 4범’ D후보를 겨냥한 매우 저급한 정치 공세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 후 A정치인은 자신의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범죄·수사 경력 회보서 ▲병적증명서 ▲재산변동사항 공개목록을 공개했다.
 
범죄 경력은 ‘전무’였고, 신고한 재산은 총 8억 원이 넘었다. (2017년 3월 기준)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병적증명서에서 발견됐다. 병적증명서에 1989년 2월 18일 육군 소위로 임관해 같은 날 ‘복무만료’로 전역했다는 내용이 기재돼 있었기 때문이다.
 
A정치인도 임관일과 전역일이 같은 ‘수상한 병역’이 마음에 걸렸던지 “참고로 제 병적증명서에 입영(임관)과 전역 날짜가 같은 이유는 당시 석사장교제도가 6개월의 군(軍) 훈련을 훈련소와 전방에서 마친 이후 임관과 동시에 전역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라는 뜬금없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고작 ‘6개월짜리 장교’였던 그가 석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는 얘기였다.
 
이를 두고 A정치인이 당시 고위층 자제들 병역 기피 수단으로 악용된 병역특혜제도의 수혜자였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A정치인은 지방 출신으로 ‘피의 학살’로 세워진 5공화국 시기를 서울에서 보냈다. 그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한 후 ‘86세대’(1980년대에 대학에 다닌 1960년대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내에서 열린 ‘반독재민주화운동’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짱돌’만은 던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시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과정과 이어 전개된 통일운동을 보면서 나는 폭력과 비폭력의 문제를 두고 크게 고민했다. (중략) 이후 나는 박사과정을 수료할 때까지 매번 학내시위에 참가하면서도 한 번도 돌을 들지 않았다. (중략) 폭력과 반평화에 저항하고자 하는 행위에는 어떠한 폭력적인 방식도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A정치인의 저서 중. 2013년)
 
당시 A정치인은 교수의 꿈을 향한 우회로였던 외무고시(2013년 폐지)를 준비했다. 1차 시험에도 합격했다. 하지만 그는 집안과 선배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무고시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 이유를 “2차 시험에서 요구하는 ‘전두환 정권의 통일방안에 대해서 논하라’는 시험을 도저히 치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광주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목격했고 가까운 친구들과 후배들이 정권의 탄압을 받고 투옥되고 있는 상황에서 합격을 위해 전두환 정권에서 바라는 모범답안을 적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A정치인의 저서 중. 2013년)
 
외무고시를 포기한 A정치인은 진로를 ‘대학원’으로 돌렸다. 석사학위를 취득한 이후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시행되고 있던 석사장교 시험을 치러 합격했고, 총 6개월의 군사훈련과 전방 근무를 마친 뒤에 육군 소위로 전역했다. 전역한 뒤 바로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한 연구소의 상임연구원으로도 활동했다.
 
석사장교제도는 전두환 정권(제5공화국) 시기인 지난 1984년에 도입된 단기장교 복무제도였다. 석사학위 소지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합격한 사람들에 한해 4개월간의 군사훈련과 2개월간의 전방근무를 거치게 한 뒤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전역시켜주는 병역특례제도였다. 석사장교는 당시 ‘예비역 사관’으로 불렸다.
 
석사장교제도의 법적 근거는 ‘대학원 졸업생 등의 병역특례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다. 지난 1980년 제정된 ‘자연계 교원요원 확보를 위한 특별조치법’이 개정된 법률인데 지난 1990년 4월 1일 법률 제4157호에 의해 폐지됐다.
 
관련법률은 지난 1983년 12월 31일부터 1990년 4월 1일까지 유지됐지만 제도는 1992년 말까지 존속됐다. 이에 따라 총 9397명이 혜택을 받아 그만큼의 ‘예비역 소위’가 양성된 셈이다.
 
석사장교제도는 카이스트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던 전문연구요원제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이스트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국내연구기관에 일정기간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군복무 혜택(4주의 군사훈련)을 주는 제도가 석사학위자들로 확대한 것이 석사장교제도라는 것이다.
 
석사장교는 그 대상을 ‘국내외에서 대학원의 과정을 이수한 자 또는 이와 동등한 또는 그 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로 규정해 국내 석사학위뿐만 아니라 외국의 석사학위도 인정했다. 이로 인해 당시 해외 유학파들이 석사장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석사장교에 선발되면 학사장교와 같은 사관후보생 신분을 부여받았다. 학사장교에게는 3년의 군복무기간이 주어졌지만, 석사장교는 4개월간 3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2개월간 전방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면 ‘군복무 끝’이었다.
 
총 6개월의 기간이 끝나면 소위로 임관함과 동시에 전역했기 때문이다. 총 ‘6개월짜리 장교’라는 뜻으로 ‘육개장’이라는 은어까지 만들어졌다. 석사장교제도는 ‘우수한 인재에게 지속적인 학문 연구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일반 병사의 군복무기간이 3년이었다는 점에서 ‘6개월짜리 장교’ 제도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일반 병사들 사이에서는 “6개월이면 그게 ‘방위’지 어떻게 대한민국 장교가 될 수 있나?”라는 힐난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에서 석사장교를 ‘방위장교’라고 비꼬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석사장교제도를 “고위공직자나 부유층 자제의 병역 기피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대표적 병역특례제도”라고 비판했다.
 
1988년 10월 17일 열린 국회 국방위의 병무청 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석사장교의 선발은 병무청이 특수 부유층 자제에 대해서 혜택을 베푼 것이 아니냐?”라고 강하게 질타했고, 당시 박명철 병무청장으로부터 “석사장교 병역특례제도는 조속한 시일 내에 없애도록 하겠다”라는 답변을 얻어냈다.
 
한편, A정치인은 지난해 3월 한 언론과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석사장교 군(軍)복무와 관련해 “외무고시 합격을 통해 교수가 되려는 꿈이 좌절돼 대학원에 갔다”라며 “이후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해 6개월만 군복무하는 석사장교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라고 궁색한 해명을 했다.
 
A정치인은 “당시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석사장교 제도를 선호했고 활용했다”라며 “결과적으로 5공 때 만들어진 제도의 혜택을 본 것이지만 특별히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특혜나 편법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라고 일각의 특혜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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