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는 시작에 불과하다.”최태원 SK(주)회장과 소버린자산운용의 정면 대결은 주주총회 이후에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소버린 외에도 SK노조와 시민단체 등 향후 최태원 독주체제를 , 예의주시할 수많은 감시의 눈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주총 결과는 SK 내부 경영 변화는 물론 타 기업의 경영 문화 전반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주총을 앞두고 의안 통과를 위한 의결권 확보 차원에서, 양측의 위임장 대결도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주총 표대결에서 SK가 소버린에 승리한다면, 최태원 회장체제가 순항할 수 있을까? 아마도 결과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최태원 회장 자신일 것이다.

올해 SK 주총에서 가장 핵심적 현안은 새로 선임되는 5명의 이사 선임건이다. SK와 소버린이 각각 5명의 이사후보를 추천했고, 이 중 복수 추천된 남대우 전 가스공사 사외이사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 자리를 놓고 치열한 표대결이 불가피하다. 결국 이사 후보에 대한 표대결 결과에 따라 사실상 경영권의 향배는 좌우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다른 쟁점 안건은 ‘이사 선임과 관련한 정관개정안’.먼저 SK측은 ‘사외이사에 한해 금고 이상의 형 선고가 확정된 자는 자격을 상실한다’는 조항을 신설키로 한 반면, 2대주주인 소버린은 ‘이사 선임에 대한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사외이사 뿐만 아니라 사내이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안을 상정했다.한 외국언론은 이를 두고 “소버린이 제안한 이 개정안은 최 회장의 최후를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만약 소버린의 제안이 주총에서 통과된다면, SK네트웍스(옛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과 관련해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최태원 회장(SK(주) 이사)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SK(주)가 보유하고 있는 SK텔레콤 지분 처리 문제도 주총 현안 중 하나. 소버린 측은 최태원 회장 퇴진 카드와 함께 SK(주)가 보유중인 SKT 지분을 매각해야한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소버린 측 주장의 요지는 ‘시가 4조원이 넘는 SKT 지분을 매각해, SK(주)의 대규모 차입금을 상환과 신규투자에 사용하는 것이 긍정적’이라는 것. 그러나 지난해 제임스 피터 소버린 대표는 ‘SKT 지분 매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어, 말바꾸기라는 비난도 받고 있는 실정이다.SK(주)는 이러한 소버린의 주장에 대해 ‘SKT 지분 매각은 곧 SK그룹의 해체를 의미’한다며 반발했다. 이동통신업계 1위 SKT의 지분보유는 그룹 유지에 필수적인 요건이라는 생각때문이다.

SK 개선안 제시하며 ‘퇴진요구’ 불식

SK측은 지난달 22일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 손길승 회장을 포함한 핵심 임원들을 SK 이사진에서 퇴진시키며 최태원 회장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대응책을 마련했다. 최태원 독주체제의 시작이라는 일부의 비판도 있었지만, 파격적인 개선안이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러한 개선안을 통해 최 회장과 SK는 소버린과의 명분싸움에서 일단 승기를 잡았다. SK 노조가 ‘최태원 회장 퇴진 요구’를 1년 간 유보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노조측은 형식적이나마 최태원 회장이 지배구조 개선안을 발표했기 때문에, 향후 실천의지를 지켜본 뒤, 그의 퇴진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소버린의 ‘최태원 퇴진’ 카드가 당분간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분식회계 등의 비리로 유죄판결을 받은 대주주의 퇴진’을 요구하는 소버린의 공세는 이번 주주총회장에서 끝나지는 않을 전망이다.최태원 회장이 제시한 지배구조개선안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소버린 측에 빌미를 제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최 회장의 SK(주) 이사직 임기가 끝나는 내년 주총장에서 다시 한번 소버린과 격돌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계에 미치는 영향도 만만치 않을 듯

제임스 피터 소버린자산운용 대표도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지면 내년 정기주총에서 더 잘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최태원 회장의 부실 경영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임을 시사했다. 소버린이 이번 주총 결과에 불복, 최회장 퇴진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은 뒤, 임시주총을 제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재계의 눈도 SK 주총에 집중되었다. SK 주총 결과는 비단 최태원 회장과 SK그룹뿐만 아니라 다른 대기업 총수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우선 개인비리 등 도덕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총수 및 경영진들 역시 자격논란 시비에 휘말려, 주주 및 시민단체들의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난달 27일 삼성전자 주총장에서, 참여연대는 삼성전자의 직원윤리규정을 거론하며 불법정치자금에 연루된 이건희 회장 등 주요 경영진을 징계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SK 측이 국내 최고 수준이라며 제시했던 지배구조개선안은 사실상 참여연대와 소버린의 줄기찬 요구에 따른 ‘자구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외국계 투자자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국내주식시장의 현실에서, 외국인 지분율이 상당수에 달하는 타 대기업들도 결국 SK에 걸맞는 개선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결국, 그동안 일부 대기업 오너가 경영권을 전횡하던 기존 관행도 SK주총 결과에 따라 상당부분 변모하게 될 것이라는 게 공통된 전망이다.

주총 기싸움

이번 주총을 앞두고 치열하게 전개된 SK와 소버린의 위임장 대결은 국내 기관투자가와 외국투자가의 국적 대결 양상까지 보였다. 미래에셋, 교보투신, 외환은행 등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대부분 소버린이 제시한 안건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사실상 최태원 회장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일찌감치 소버린 지지의사를 밝힌 영국계 자산운용사 헤르메스 이외에도 슈로더투신운용 등 외국계 투자가들은 소버린측 제안에 찬성하는 의결권을 행사한다고 공시했다. 국내 기관투자가는 국내 경영진을, 외국계 투자가들은 외국계 주주측의 안건을 지지해온 그간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이같은 현상은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SK 주총은 국내 기관과 외국계 투자가간의 국제적 대리전 양상까지 확산되었던 것.일부 SK 지지자들은 소버린을 지지하는 측을 ‘매국노’라는 격한 표현까지 써 가며 비판하기도 했다. 역(逆) 국제전도 활발히 진행됐다. SK임원진은 홍콩, 영국 등을 돌며 외국계 투자가들을 면담하고 지지를 받기 위해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소버린 측도 주총에 앞서 SK(주)노조 및 소액주주들과 잇따라 간담회를 가지며,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이러한 와중에, 온라인증권동호회 팍스넷에서 활동중인 이모(ID mailway)씨를 비롯한 일부 국내 소액주주들이 소버린 지지의사를 밝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씨는 “부도덕한 이사 퇴진 및 지배구조 개선을 주장해온 소버린 측에 공감해 의결권을 위임한다”고 밝혔다. 한편 SK(주) 직원들을 대상으로 위임장을 확보하며, 주총에 적극 참여할 움직임을 보였던 SK 노조는 ‘SK도 소버린도 아닌’ 입장을 보였다.

노조측은 ‘투명경영을 강화하려는 소버린의 입장은 지지하나, 소버린의 역할은 경영권 장악이 아닌 감시자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 노조측의 입장은 ‘그동안 최태원 회장 일가가 각종 비리에 연루되며 경영 손실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지만, 추후에 개선안 이행 과정을 지켜본 뒤, 퇴진요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얘기다. 이러한 노조측의 입장 배경에는 지금 당장 최 회장이 퇴진할 경우 적대적 M&A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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