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2월 보름 연등회 행사차 충선왕이 봉은사에 가서 최감, 박전지, 오한경, 이진 등에게 상승국(尙乘局, 궁중의 수레나 말을 맡아보는 곳)의 안마(鞍馬, 안장 얹은 말)를 하사하였다. 이튿날 여러 신하가 헌수(獻壽)하였는데, 차례가 4학사에 이르자 왕이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여 술을 따라 주면서 말하기를 “여러 학사들이여, 그대들은 숨길 것 없이 속에 있는 말을 다하라”고 했다.
고려는 건국 때부터 도선국사의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산천에 제사지내고, 일식이나 월식 같은 ‘천변(天變)’이나 지진이나 해일 같은 ‘지이(地異)’가 있을 때면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다. 또 왕이 기우제를 지낼 때면 무당을 수시로 불렀다. 이로 인하여 국정이 문란하고 사회가 어지러워질수록 무당들이 판을 치고, 하층민들까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무당을 찾았다. 오죽하면 안향(安珦)은 당시의 세풍(世風)을 시로써 읊어 남겼을까. 

향등 켜져 있는 곳마다 부처님께 빌고
장구 북 피리소리 나는 곳은 굿하는 곳일세.
오직 공자를 위하는 대성전(大成殿)에는
온 뜰에 가을풀 쓸쓸한데 사람 하나 없구나.

안향은 이러한 사회를 바로잡고 민심을 일신시키기 위해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신진 사대부 계층인 백이정, 권부, 우탁에게 전했다. 이후 이진은 안향의 천거에 의해 경사교수도감사를 역임하게 된다. 
이제현은 부친 이진과 안향과의 인연으로 안향의 문하생인 백이정으로부터 남보다 먼저 성리학을 배울 수 있었다. 백이정은 원에 건너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1308년(충렬왕 34)에 원에서 귀국했으므로, 이제현이 성리학에 접한 것은 나이 20대 초반에 해당한다. 이 무렵에는 성리학이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된 것도 아니고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교육하지도 않았다.
백이정은 이제현을 비롯한 문하생들에게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세계와 모든 사물 및 인간은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존재한다는 철학이다. 즉, 우주의 기본 원리와 인간의 본성을 이와 기로 설명하는 성리학의 철학 이론이 이기론(理氣論)인 것이다.”
이제현과 스승 백이정 간의 성리학에 대한 대화는 계속된다.
“이와 기는 어떻게 다른 것이옵니까?”
“이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 이치이며, 기는 이의 원리가 현실로 구체화되는 데 필요한 현상적 요소이다.”
“그러면 이와 기의 상관관계는 어떠하옵니까?”
“이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없으면서 또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것이다. 우주의 만물은 이를 토대로 기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생성·소멸하고, 기의 운동 법칙에 따라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물질의 생성, 소멸 등 현상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사옵니까?”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이는 형체를 초월한 형이상(形而上)의 도(道)이며 만물을 생기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서,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적 원리나 법칙을 의미한다.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形而下)의 존재이며, 만물이 생기는 데 갖추어야 할 재료로서 이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측면(이기론)보다 실천적 분야가 강조되었다. 즉, 신진 사대부들은 일상생활의 범절을 비롯하여 수양을 위한 격언, 충신·효자의 사적(事績, 공적)을 기록한 소학(小學)을 장려하였다. 또한 불교를 비판하고 불교 의식을 추방하기 위하여 주자가례를 보급하고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대부 집안의 사당인 가묘(家廟)를 세워 유교 의식을 정착시켜 나갔다.
그해 11월 말경. 조정에서 이제현에게 교지가 내려왔다.

‘다음 해 1월 초까지는 연경에 당도하라.’ 

이는 만권당의 개소식 전에 이제현이 연경에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이제현은 부친 이진, 장인 권부를 찾아뵙고 출국인사를 올렸다.

연경으로 떠나기 며칠 전 오후. 이제현은 어릴 때부터 부친 이진을 따라 함께 드나들었던 민천사(旻天寺)를 찾았다. 민천사는 충선왕이 복위한 해(1309년) 9월에 수녕궁(壽寧宮)에서 1만 반승(飯僧, 식사를 대접함)을 베푼 뒤 모후인 제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비는 원찰(願刹)로 창건한 절이었다. 민천사는 개경 하지전(下紙展) 수륙교 옆에 있었는데, 앞에는 광명천이 흘러 사천강에 닿아 임진강으로 이어지며, 뒤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절을 둘러싸고 있어서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사문(寺門)을 들어서니 승방에서 낭랑한 염불소리가 목탁소리와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무외(無畏) 주지스님은 저만치 대웅전 앞까지 마중 나와서 이제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합장하고 인사를 나눴다.
“주지스님께 출국 인사를 하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엄동설한에 밖에까지 마중 나오시다니요.”
“익재 공께서 원행(遠行)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한시각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이렇게 나왔지요. 앞으로 긴 세월 동안 만날 수 없을 인연이니, 오늘이라도 실컷 봐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하 하 하.”
“원, 스님께서도 별소리를 다 하십니다.”
“날씨가 매서우니 어서 승방으로 드시지요.”
“예, 스님.”
주지 방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된다.
“스님, 연경에 가면 원나라의 명망 높은 학자들과 교유해야 할 텐데 어떻게 배움을 실천해 나가야 좋을까요.”
“선비는 도를 알고 행하여야 합니다. 자기 처지를 알아야 인세(人世)의 덕을 펼 수 있는 법입니다.” 
“태조 왕건 대왕께서는 정치와 종교를 분명하게 구분하였는데 스님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정치는 유교에 입각하되, 민심 수습과 국민 단결은 불교를 통해서 하겠다는 태조의 입장은 고려의 국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방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께서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신라 멸망의 한 원인은 과도한 절의 남설(濫設)과 그로 인한 경제적 혼란에 기인한 바 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빈도(貧道)도 익재 공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태조께서는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도선대사의 ‘비보사탑설’에 따라 함부로 절을 짓지 못하도록 당부하여 후대에 있을지 모를 사원의 남설로 인한 폐해를 막고자 한 것입니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대사가 선정한 이외의 사원을 짓는다면 지덕(地德)을 훼손하여 국운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는 앞으로 유교로서 나라에 봉사하고 불교로서 마음을 다스릴 생각입니다.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고 성품을 닦는 일에는 불교의 가르침보다 나은 것이 없고,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에는 공자의 가르침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익재 공의 생각은 결국 유교와 불교의 근원이 같다는 유불일치(儒彿一致) 견해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한낮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은 석양이 지고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저녁공양을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때 저녁예불을 알리는 커다란 범종소리가 경내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제현은 자리를 일어서며 합장을 하고 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다 보니 어느덧 저녁예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원로(遠路)에 건강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
이제현은 대웅전 지붕에 걸린 으스름달을 뒤로하고 민천사를 나왔다. 무외 스님과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면서.  
다음 날 저녁. 동갑내기 결발동문(結髮同門) 4인방인 이제현, 박충좌, 안축, 최해가 개경 십자가 주막거리의 단골 술청에 모였다. 이제현의 장도(壯途)를 축하해주기 위함이었다. 저녁나절에 만난 네 선비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그리고 유교와 불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치국(治國)의 방략(方略)을 피력하였다.
먼저 최해가 덕담을 건넸다. 
“익재, 자네의 학문은 고려에서 으뜸이니 원나라 대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네. 나의 할아버지 치(致)자 원(遠)자 어른께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는데, 반란 수괴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네. 당나라에 문명(文名)을 떨친 할아버지의 전통을 자네가 원나라에서 되살리기를 기대하네.”
안축도 최해의 덕담에 가세했다. 
“최치원 선생께서는 고려 태조가 반드시 천명을 받을 것을 짐작하곤 ‘계림(鷄林)에는 누른 잎이요, 곡령(鵠嶺)에는 푸른 솔이로다’ 라는 글을 지어 올렸네. 계림은 신라를 가리키고 곡령은 고려를 가리키니, 신라가 쇠하고 고려가 성할 것을 넌지시 암시한 글이었네. 익재도 주역에 일가견이 있으니, 대륙의 정세를 면밀히 관찰해 주기 바라네.” 
불교에 일가견이 있는 박충좌도 장도를 떠나는 벗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익재, 자네를 쓰는 일에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자네를 버리는 일에는 불교의 진여(眞如,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한 절대 진리)를 따르면 모든 번뇌를 해탈할 수 있을 것이네.”
결발동문들의 덕담이 끝나자 이제현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만권당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생각이네. 사람을 배우고, 대륙을 배우고, 그리고 인생을 배울 생각이네. 이런 ‘큰 배움’을 위해 뜨거운 열망을 가지고 모든 가치에 도전할 생각이네.”
결발동문들이 베풀어준 그날의 축하 송별연은 유시(酉時, 17시~19시)에 시작하여 자시(子時, 23시~01시)까지 이어졌다. 세차게 부는 새벽바람을 가르며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이제현은 다소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권씨 부인과 마주 앉았다.
“여보, 고국에서의 밤도 오늘이 마지막이오.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그동안 출국 준비는 차질 없는지.”
“예, 당신은 조정의 대표로 연경 만권당의 문사로 뽑혔어요. 그러나 저는 왠지 그런 당신을 제대로 내조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누구 못지않은 부덕(婦德)과 세상을 읽는 안목과 지혜를 가진 훌륭한 여자요.” 
“그러나, 원나라 연경은 세계의 중심이라 하던데…….”
“원나라 연경은 나에게도 미지의 땅이오. 그동안 학문을 통해서 작은 지식을 얻은 바 있지만 넓은 세계를 호흡하고 배운다면 조정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리다.”
“예. 저도 열심히 당신을 내조하겠어요.”
이제현은 부인 난이의 손을 꼬옥 잡았다. 매일 보는 남편과 아내 사이였고 손만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서로였지만 그날 밤은 새로운 욕구로 다가 왔다. 마치 한 줄기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가슴속에 묻혀 있는 불씨가 새록새록 살아났다. 참다운 사랑에 두 사람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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