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처음 떠나는 원나라 여행 

이튿날 아침. 
이제현은 창호(窓戶)로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겨울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태어나서 처음 떠나는 대륙 여행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그는 서둘러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부친 이진, 장인 권부를 비롯한 친척들은 선의문(宣義門)까지 따라 나와서 배웅하였다. 개경의 서대문은 선의문이다. 선의문을 나서면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부친·모친, 장인·장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난 이제현은 장남 서종(瑞種)의 손을 잡고 권씨 부인은 강보에 싸인 차남 달존(達尊)을 포대기에 싸서 안고 언제 올지 기약 없는 개경을 감회 깊게 돌아보며 연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정에서는 역관과 의원, 그리고 호위군관과 말을 돌보고 모는 일을 하는 마두(馬頭)를 딸려 보냈다. 이제현이 탄 말은 자주색 갈기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잘록한 허리를 하고 있어 마치 천리마를 연상케 했다. 행장은 단출했으나, 말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았다. 왼쪽 주머니에는 벼루와 먹을 넣고 오른쪽 주머니에는 붓 세 자루, 공책 다섯 권, 연경까지의 지도책 한 축을 넣었다.  
이제현 일행은 개경 선의문 밖 서교(西郊)에서 서북쪽으로 평주·서경·의주를 경유하여 보름 만에 압록강 하구의 의주성에 당도했다. 12월의 압록강은 벌써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다시 의주를 떠난 이제현 일행은 중도(中島)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압록강 중도는 아직 고려 땅이다. 
다음날 아침. 이제현이 압록강을 건너던 날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뿌연 하늘빛 한가운데 햇무리가 져 있었다. 일행은 한결같이 길조라고 말하며 기뻐하였다. 압록강가에 서서 멀리 앞을 바라보니 살을 에는 혹한의 추위가 도강(渡江)을 가로막았다. 뒤를 돌아보니 구름 덮인 조국 산천이 점점 멀어져가 끝 간 데 없는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마음은 벌써 길 따라 개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이천리 길을 유유히 흘러온 압록강을 위화도를 우측으로 바라보며 도강(渡江)했다. 자신의 뼈를 묻어야 할 고려의 강토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대륙의 바람은 혹독했으며 삭풍은 나무 끝에 불었다. 말을 하려고 입만 뻥긋해도 어김없이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고드름으로 변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부터 눈보라가 더욱 자욱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을 뜨기가 어려워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눈보라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설원에 겨울 해는 힘없이 지평선에서 떠서 지평선으로 함몰되었다.
‘우리 땅이었던 것을…….’
어깨 위에 눈이 수복하게 쌓인 이제현은 눈 속에 파묻혀 숨어버린 차가운 명월(明月)을 쳐다보며 문득 선조 고구려인의 기상을 떠올렸다. 을지문덕(乙支文德), 연개소문(淵蓋蘇文), 양만춘(楊萬春) 장군의 환영(幻影)이 차례차례 눈앞을 아른거렸다. 비록 무장은 아니었지만 이제현의 가슴은 금세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현 일행은 드디어 삼강(三江, 애자하) 하구에 이르렀다. 이제현은 자신을 태운 말이 원나라 쪽 강안(江岸)에 닿자 말에서 내렸다. 난생처음 밟아보는 원나라 땅이었다. 이제현이 눈을 지그시 감고 심호흡을 하자 형언하기 어려운 감회가 그를 감싸고돌았다. 
‘지금은 원나라 땅이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호령하던 땅이지 않은가?’
대륙을 호령하던 선조들의 거친 숨소리, 안시성 영웅들의 힘찬 함성, 요동 벌판을 휘몰아치던 고구려인들의 말발굽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이제현을 전율케 했다. 
이제현 일행은 압록강으로부터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 단동의 북쪽)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묵었다. 구련성은 고구려의 옛 성인데 평지에 쌓은 성터는 허물어지고 을씨년스러웠다. 바로 눈앞에 고구려 때 세운 박작성(泊灼城)이 보였다. 압록강변에 우뚝 솟은 산성인데, 원나라는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로 강 건너 의주를 감시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구련성을 출발하여 허허벌판을 거쳐 금석산(金石山)에 이르렀다.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니 의주 삼각산이 아스라이 보였다. 이제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갯길을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니 점점 작아지던 삼각산이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총수에서 하룻밤을 묵은 이제현 일행은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책문(柵門)에 도착했다. 이곳이 명실상부한 원나라 관문이다. 책문을 통과하니 비로소 원나라 백성들과 민가가 보였다. 각이 지고 반듯한 벽돌집이었다. 고려의 백성들은 흙 담에 초가지붕을 얹고 사는데 원나라는 흙을 구운 벽돌로 집을 짓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책문 안의 민가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 웅장하고 깊으면서도 툭 트였다. 상점이 즐비한 거리에는 술집을 알리는 푸른 깃발 하나가 공중에 솟아 있었다. 이제현은 일행과 함께 주막집으로 들어갔다. 이미 고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그들과 수인사를 나눈 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 
다음 날. 책문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한양의 조산(祖山) 삼각산을 닮은 친근한 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봉황산(鳳凰山)이었다. 원나라 땅에서 조국의 산을 본 것처럼 반가웠다. 봉황산은 흡사 돌로 만들어 놓은 듯 평지에 우뚝 솟아 있었고, 손바닥에 손가락을 세운 듯, 도끼로 깎아 놓은 듯한 산봉우리는 가히 장관이었다. 
압록강에서 원나라 연경까지는 역참이 30개가 있다. 이제현 일행은 봉황산에서 20리를 더 가서 그 첫 번째 역참인 봉황성(鳳凰城, 고구려 오골성)에 도착했다. 이 봉황성은 고구려 시대 전시성으로서 요하를 건너 침략해온 수·당군을 물리치는 전투를 지휘하는 성이었다. 수문제(隋文帝)와 수양제(隋煬帝)의 대군을 물리친 대첩도 바로 이 봉황성에서 고구려 영양왕(陽王)이 진두지휘했었다. 봉황성의 번화함과 부유함은 뜻밖이었다. 중국 동쪽의 한 후미진 변방이 이 정도라면 과연 연경은 어떠할까 라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제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봉황성을 지나자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요동(遼東) 벌판이 전개되었다. 백리의 넓은 들판도 찾아보기 힘든 좁은 고려 땅에 갇혀 살아서일까,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요동벌은 며칠을 내처 가도 지평선에서 해가 떠서 지평선으로 해가 졌다. 왕래하는 거마(車馬)는 더욱 많았으며, 모래는 더욱 미세하여 바람만 불면 휘날려서 마치 연기나 안개가 낀 것과 같았다.
이제현은 요동을 벗어나면서 난생 처음 하늘과 땅이 맞붙어 우주의 공간을 나눌 수 없는 장엄한 광경을 보고 감격했다. 그리하여 동행한 조정 관원들에게 민족주의자의 소신의 일단을 피력했다.
“단기 3259년(926년) 해동성국 발해(渤海)가 멸망하고,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만주를 아우르던 광대한 강역이 한반도 지역으로 좁혀져 국토는 거의 5분의 1 수준으로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단기 3326년(993년, 성종 12)에 거란이 고려를 침입해 왔으나, 서희(徐熙) 대감의 외교에 힘입어 오히려 강동 6주를 회복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고려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요동 땅은 원나라의 영토이나 과거 우리 땅이었습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크고 담대한 기상이 이 요동 벌판에 살아 숨 쉬고 있어요. 우리는 고구려의 핏줄을 이어받고 있으면서 이 땅을 남의 땅으로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입니다.” 
조정 관원들은 이제현의 거침없는 역사 강론을 귀를 쫑긋하게 세워 들었다.
“단군조선 이후 발해시대까지 우리 민족은 요동과 만주지역을 근거지로 한 대제국을 건설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들과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던 위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활동무대는 언제나 저 요하와 만리장성을 경계로 한 만주대륙과 발해만 일대의 바다였으며, 한 번도 주변 강대국에 예속된 적이 없었습니다.”
“…….”
“엄동설한의 모진 추위 속에서도 해묵은 매화나무 가지에는 꽃망울이 돋아납니다. 그렇듯 우리는 현재 반도에 웅크리고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되찾아야 할 우리 땅 요동과 만주지역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현의 도도한 역사 강론이 끝나자 일행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이제현 일행은 봉황성을 떠나 통원보(通遠堡), 초하구(草河溝), 연산관(連山關), 청석령(靑石嶺)을 거쳐 요양(遼陽)에 이르렀다. 요양은 고구려시대 요동성이 있던 자리이다. 요양에 들어서자 뽕나무와 삼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개와 닭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길가에는 추위에 얼어붙은 버드나무가 홍수를 이루고 있었으며, 인가에 언뜻 보이는 외양간 안의 소는 빛깔이 마치 옻칠을 한 듯 까맣게 빛났다.
사방을 둘러보니 드넓은 벌판에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이곳은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며 피를 흘렸던 전쟁터였다. 천하의 편안함과 위급함은 이 요양의 넓은 들판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잦아들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싸움 북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심양성(瀋陽城) 문으로 들어가니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말을 탄 사람들이 서로 닿을 정도로 성안 풍물의 번화함과 점포의 화려함이 요양의 열 배는 되는 것 같았다. 점방을 보는 점원들 모두 의관을 정제한 맵시가 깔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날 한 나절 심양성의 풍물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객사에 들어가 하루를 묵었다.
이제현은 아들 서종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한나라가 4군을 두었을 때엔 이곳이 낙랑의 군청이었고, 위·수·당나라 때는 고구려에 속했었다.”
어린 아들은 말귀를 알아듣는 것처럼 아버지의 설명을 경청했다. 
이튿날 심양을 떠나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북녕(北寧)으로 향하는데 요하(遼河)를 건너면서 요서(遼西) 땅으로 넘어섰다. 요하를 건너면 진정한 의미의 중국 땅에 들어가고 장성(長城) 권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요하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지방이라 부른 것은 발해시대부터였다. 요서평야는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광대무변의 땅은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일대 장관이었다.
이제현 일행이 요하를 지나 발착수(渤錯水, 일판문과 이도정 사이)를 지날 때였다. 평지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흩어져 허공에 날리고 방향을 바꾸면서 얼굴을 후려쳐 앞을 가렸다. 이때 알 수 없는 곳에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668년 전(645년). 당태종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 요동성(遼東城, 지금의 요양)·백암성(白巖城, 지금의 연주성)을 함락하고 포거(抛車, 큰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와 충거(衝車, 성벽을 파괴하는 돌격용 수레)를 동원하여 안시성(安市城)을 공략했지만 양만춘(楊萬春) 장군에게 패하여 눈을 잃고 패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당나라군이 퇴각한 경로는 요하 하구 쪽이었다. 일판문(一板門)과 이도정(二道井)은 지세가 움푹 들어간 까닭에 비가 조금만 와도 진창이 되어 버린다. 겨울에 꽁꽁 얼었던 진흙땅이 해동이 될 무렵, 잘못하여 진창에 빠지면 군사는 물론 군마와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수레도 삼켜버리는 무서운 지역이다. 
이제현은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의 구절을 상기했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고,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 빠져 나갈 수 없으니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소이다.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그리고 《당서(唐書)》의 기록을 반추해 보았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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