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으로 떠나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행사 준비과정에서 국군포로 및 납북자 50명을 별도로 선정해 북측에 생사 확인을 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50명 중 북측은 총 21명의 생사를 확인했고, 29명은 확인 자체가 불가했다.

실제 국군포로와 납북자 당사자들은 모두 생존해있지 않지만, 이번 행사에 6명의 국군포로 및 납북자 가족이 상봉하게 된다.

"아버지는 늘 '제대로 먹이지도 못하고 고생만 시키다가 사라져서 생사도 모르고 있는 게 한스럽다. 피난이라도 갈걸'이라며 후회했다."

이날 상봉장에서 조카들을 만나게 된 이재일(85)씨는 6·25전쟁 당시 납북된 형님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1950년 전쟁 당시 인민군들이 고향인 충북 청주까지 내려와 모내기 중 가족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가족들은 며칠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형님은 납치됐다. 당시 형님 나이는 18세. 

이씨는 "형님이 납치된 뒤 아버지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앓기 시작했고 국군이 후퇴해 내려올 때마다 그 기회를 틈타 도망오지 않을까 간절히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며 " 형님은 돌아오지 않았고 1954년 11월9일 아버지는 52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이씨는 "아버지가 형을 너무 그리워하며 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 기억이 더 많이 난다"며 "형님 납치 이후 그해 겨울에 가족들이 피난길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본가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곽호환(85)씨는 전시납북된 형님의 두 아들 곽정철(55)씨와 곽영철(53)씨를 만난다.

당시 곽씨 가족은 충북 제천시 금성면에 살았다. 곽씨는 "여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인민군 관계자들이 회의한다고 소집시켰다"며 "형님이 그 회의에 가서는 안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곽씨의 형님과 함께 사라진 사람은 10여 명으로 당시 형님 나이는 21세에 불과했다.

곽씨는 "이번에 적십자에서 확인해준 걸로는 (형님이) 1981년에 돌아가셨다고 다"며 "이번에 (조카들을) 만나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라고 전했다.

곽씨와 동행하는 아들 곽상순(59)씨는 "아버님은 오래 전부터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다. 큰아버지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다"며 "이번에 그 자녀들이라도 만나게 돼서 소원풀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인 이영부(76)씨는 아버지가 전시납북됐다. 아버지의 생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북에 형이 살아있다는 말을 고모에게 전해듣고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해 조카들을 만나게 됐다.

이씨는 "6·25 때 아버지와 함께 남한으로 와서 서울 혜화동에 거주하면서 아버지는 통장으로 일했다"며 "당시 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피난 오는 상황이었고, 인력이 부족해진 북 당국이 남한 사람들을 많이 납치해갔다"고 떠올렸다.

이씨는 "아버지가 1950년 9월27일 납북됐다. 당시 8만명이 납북되던 시기"라며 "북이 남쪽 사람들 신상을 파악해서 쓸만한 사람들을 데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인민군에 납치됐지만 북에선 자진납북이라고 주장해왔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납북될 당시 이씨는 초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어머니는 생활고로 30대 후반 이른 나이인 1962년 돌아가셨다고 이씨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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