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전국경제인연합회 빌딩 내부는 만감이 교차되는 듯한 분위기였다.이 날 전경련은 차기 회장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키로 했다. 그동안 전경련 회장직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임 회장을 발표하는 곳의 분위기는 들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감이 교차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지된 것은 전경련의 새로운 ‘함장’자리가 전경련의 ‘기대’와 맞지 않았다는 데 있다. 결론은 강신호 현 전경련 회장(동아제약 회장)을 다시 추대한다는 것이었다. 현명관 전경련 부회장은 “어젯 밤 강신호 회장이 승낙한다는 뜻을 밝혔다”며 “강 회장을 주축으로 재계의 단합과 전경련 이미지 개선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현 부회장은 또 이례적으로 삼성, 현대차, LG그룹에서도 이번 회장 추대를 흔쾌히 동의했다고 말해 의미를 부여했다. 사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몇 차례 전경련의 ‘러브콜’을 거절한 이후, 강 회장이 연임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은 지배적이었다.

S그룹의 한 관계자는 “전경련 회장직은 한 사람이 몇 차례씩 연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강 회장 역시 이같은 관례를 따를 것으로 예견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재계 관계자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다. 강 회장의 연임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고사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삼성측의 공식적인 답변은 ‘건강상의 이유 때문’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과거 폐암수술 병력 등이 있어 늘 건강을 각별히 챙기는 편”이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전경련 회장직을 수차례 고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재계 관계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불과 3주전인 지난 1월 26일 ‘이 회장의 분신’으로 불리는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얘기 때문이다.

이 구조조정본부장은 이 날 언론과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 회장의 ‘건강 의혹’을 전면 불식시키는 얘기를 했던 것. 이 본부장은 “지난해 삼성의료원, 국립암센터 등 병원으로부터 병이 완치됐다는 ‘완쾌’ 판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난 99년 폐암으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일종의 ‘관리기간’인 5년 동안 상태가 악화되지 않았고 또 재발 가능성이 0%라는 얘기다. 그런데 불과 3주 만에 이 회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전경련 회장직을 고사하는 것은 다소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재계 관계자들은 이 회장이 전경련 회장을 고사한 이유를 ‘분위기 탓’이 아니겠냐는 시각을 보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안티재벌’ 성향을 고수해왔다. 지난 2003년 연말에 있었던 ‘대기업의 불법 정치자금 파문’은 삼성, 현대차, LG등 주요그룹은 물론, 20대 그룹을 직접 겨냥하기도 했다. 물론 최근들어 노무현 정권이 국내 기업들과의 ‘거리 좁히기’에 나선 부분이 있지만, 아직까지 현정권에서 재벌 그룹의 대표격인 전경련 회장직을 맡기는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시선.

더군다나 전경련의 위상이 예전같이 않다는 점도 이 회장을 머뭇거리게 하지 않았겠느냐는 시선도 많다. 전경련은 지난 70~8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경제발전의 주축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경련의 이런 위상은 90년대에도 이어졌지만, 90년대 후반 DJ정부 들어서 힘이 많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DJ의 ‘빅딜 정책’은 재계 그룹을 편가르게 됐고, 자연스럽게 그룹 총수들의 전경련 방문도 뜸해진 것. 전경련이 최근까지도 이건희 회장에게 목을 맸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흩어진 재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하지만 이 회장으로서는 전경련의 이같은 ‘러브콜’이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시각이다. 이 회장의 이번 처신을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묶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본인으로부터 ‘대권’을 물려 받아야하는 아들의 앞길에 문제가 생길 소지를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어쨌거나 전경련은 ‘이건희 카드’ 대신에 ‘강신호 연임’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 덕분에 이 회장으로서는 당분간은 전경련 회장직을 맡아달라는 끝없는 구애에서 자유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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