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건 131]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의 재구성
[그때 그 사건 131] 2009년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의 재구성
  • 윤광제 작가
  • 입력 2018-09-03 08:56
  • 승인 2018.09.03 08:56
  • 호수 1270
  • 2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시스>
죄의식 없는 충동 범죄에 온국민 경악
당신도 잠재적 범죄 표적이 될 수 있다

 
2009년 1월은 온 국민이 강호순이라는 살인마의 잔인한 범행에 경악과 분노로 끓었던 때로 기록됐다. 경기도 군포시에서 한 여대생이 실종된 뒤 36일 만에 용의자로 검거된 강호순은 여대생뿐 아니라 경기도 서남부 지역에서 실종된 부녀자 7명을 모두 납치 살해한 사실이 경찰 수사에서 밝혀졌다. 7명에 이르는 연쇄살인이라는 사실과 범행이 죄의식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러졌다는 점이 큰 충격을 줬다.
 
“목적이 돈도, 성폭행도 아니었고 순간순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연쇄살인범 강호순(당시 38세)이 2006년 12월부터 약 2년 사이에 부녀자 7명을 살해하고 경찰에서 밝힌 범행 동기였다. 강 씨는 2009년 1월 24일 검거된 후 “2005년 아내가 사망하면서 여자들을 보면 살인 충동을 느꼈고 1차 범행을 한 다음부터는 (충동을) 자제할 수 없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강 씨는 2006년 12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2년 사이에 부녀자들을 납치 또는 유인해 살해한 다음 시신을 암매장했다. 1~5차 범행은 2개월 사이에 이뤄졌고 나머지 2건은 2008년 11~12월 저질러졌다. 1~5차 범행에서는 이틀 사이 2명을 살해한 적도 있어 경찰이 범인이 서로 다른 사건일 가능성을 짚었을 정도였다.
 
피해 여성 7명은 배모(당시 45세·노래방도우미), 박모(당시 37세·노래방도우미), 박모(당시 52세·회사원), 김모(당시 37세·노래방도우미), 연모(당시 20세·여대생), 김모(48세·주부), A(21세·여대생)씨 등이었다.
 
경찰은 2008년 12월 9일 오후 3시 7분께 군포보건소 앞에서 실종된 여대생 A(당시 21세)씨가 실종된 뒤 46일 만인 2009년 1월 24일 강호순을 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했다. 당시만 해도 강호순이 7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끔찍한 ‘연쇄살인범’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먼저 A씨가 CCTV에 마지막으로 포착된 군포보건소 앞, 휴대전화가 꺼진 안산시 건건동, 범인이 현금을 인출한 안산시 성포동 등 3곳을 꼭지점으로 하는 가상의 동선 3개를 그렸다.
 
그런 다음 실종 당일 이 동선이 지나는 곳에 설치된 300여 대의 CCTV에 잡힌 차량 7천여 대의 운전자를 추적, 알리바이를 확인하고 용의점을 수사했다. 실종 당일 오후 3시 22분께 이 가상 동선을 통과한 검정색 에쿠스 차량의 소유주 김모(당시 64세·여)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실제 차량을 운전한 사람은 김 씨의 아들 강 씨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사건 당일 강 씨의 알리바이를 추궁하며 수사망을 좁혔고 불안감을 느낀 강 씨는 자신의 안산 집 앞 빈터에서 어머니 소유의 에쿠스 승용차와 자신의 무쏘 차량을 불태웠다. 경찰은 범행 차량에서 나올 수 있는 피해자의 혈흔 등 증거를 인멸하려 한 것으로 보고 강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 그를 직장인 안산 상록수역 인근 스포츠마사지숍에서 검거했다.
 
강 씨는 밤샘 조사에서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다 경찰이 현금 인출기에 신용카드를 집어넣는 장면이 잡힌 CCTV 화면을 보여주며 뭉툭한 손가락이 그의 손가락 생김새와 똑같은 점을 확인시켜 주자 결국 살해 사실을 자백했다.
 
그는 그러나 계속되는 경찰의 여죄 추궁에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증거를 가져와라. 그러면 자백하겠다”며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연쇄살인 시인은 프로파일러가 투입되고 지루한 심리전이 진행되다 결정적인 물증이 제시되면서 검거 엿새 만에 그의 입에서 서서히 흘러나왔다. 뚜렷한 단서가 없어 미제로 묻힐 뻔한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실종사건을 일거에 해결하는 순간이었다.
 
7차 사건 당일 범행 차량이 찍힌 CCTV와 함께 경찰이 강 씨의 수원 당수동 축사에 있던 리베로 트럭에서 압수한 강 씨의 점퍼 소매에 남아 있던 혈흔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열쇠가 됐다.
 
경찰은 소매에 묻어 있던 극미량의 혈흔을 DNA 분석해 2008년 11월 9일 저녁 수원시 당수동 수인산업도로 버스정류장에서 실종된 주부 김 씨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과학수사가 우리의 수사현장에서 그대로 재연된 것이다.
 
경찰 조사결과 강 씨는 피해 여성 7명 가운데 3명은 노래방에서 유인해 성관계를 맺은 뒤 살해하고 4명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을 태워주겠다고 유인하거나 납치해 강간 또는 강도 행위를 한 후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6년 12월 노래방 도우미 배모씨가 실종된 것을 시작으로 다음 달 여대생 연모 씨까지 닷새에 1명꼴로 부녀자 5명이 잇따라 실종되자 주요 언론은 화성부녀자 연쇄강간살인사건(1986∼1991년)의 악몽을 떠올렸다. 그 여파로 경찰이 수사본부를 설치하는 등 수사를 강화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러나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CCTV에 잡힌 7천여대의 차량 소유주를 일일이 확인하는 저인망식 수사와 이후 프로파일러를 활용해 용의자와 심리전을 벌이거나 용의자 주변에서 확보한 증거물을 분석하는 과학수사를 결합한 ‘한국형’ 수사 방식으로 게임을 즐기듯 여유를 보였던 연쇄살인범의 고개를 떨구게 만들었다.
 
범죄심리분석 전문가들은 그를 반(反)사회적 인격장애자인 사이코패스로 분류했다. 프로파일러들의 분석에 따르면 강 씨는 다른 사람에게 쉽게 공격성을 노출하며 냉소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으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등 무책임하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졌다.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들을 유인할 때 양복을 입고 호감을 주려고 했다는 강 씨의 진술은 일본 게이오의과대 범죄심리학자 니시무라 박사가 사이코패스를 표현한 ‘정장 차림의 뱀(snakes in suits)’을 연상시킨다.
 
2008년 10월 20일 서울 논현동 고시원에 불을 지르고 흉기를 휘둘러 6명을 살해한 정상진 역시 정서적 문제와 인격장애가 있지만 사물 변별 능력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상태에서 범행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 살인범 조승희의 사례에서도 전문가들은 사이코패스 판정을 내렸으나 사건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큰 사건을 저지를 줄 몰랐다”고 했다.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유영철과 정남규 역시 사이코패스로 진단받았다.
 
광주여대 두영택 교수(이학박사)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로 볼 때 사이코패스 범죄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며 “연쇄살인범을 조기에 검거하고 새로운 형태의 강력범죄에 안전망을 치려면 사이코패스에 대한 연구와 적절한 수사, 교정 대책들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두 교수는 “국가적 차원의 범죄환경 개선작업이 필요하지만 시민들 스스로도 생활 패턴을 점검해 범죄 피해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