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포시 감은 눈으로 왼손 손가락이 열두 줄 위에 가볍게 놓이고 가야금 열두 줄이 울리기 시작하자 방 안은 금세 물이 괸 연못처럼 잠잠해졌다. 이제현이 탄주하는 가락은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물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제현의 입에서는 구슬픈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데,       
세상에 견줄 만한 것 없이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도 기우네.          

이제현은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노래했다. 왕위를 버리고 학문과 시화에 심취하여 일생을 여유 있게 관조하는 충선왕. 그리고 그를 둘러싼 주변 여자들이 하나같이 절세가인이어서 분위기를 한껏 띄운 것이었다. 
가야금 탄주 소리와 노랫소리가 동시에 멎자 좌중은 말을 잃고 이제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충선왕을 시중들던 여인들은 짧은 숨을 내뱉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아, 어쩜 저럴 수가.”
충선왕도 이제현의 노래 소리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역시 익재공답구나. 익재의 시문은 고려에서 최고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과연 가야금 탄주 솜씨와 음악에 이토록 조예가 깊은 줄은 미처 몰랐네.”

“황공하옵니다. 전하.”
“자, 과인의 술 한 잔 받게나.”
“예, 전하.”

연경 입성 첫날의 환영식은 이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다. 이제현은 환영식장을 나와 동편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때마침 이국(異國)에서의 첫날 밤을 축하해 주는 서설이 내리고 있었다. 만권당의 눈보라는 하늘과 땅을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발은 교교한 달빛을 반사하여 시리도록 눈부셨다. 정원을 덮고 있는 소담스런 눈송이는 새벽녘에야 멎으려는 양 나비떼가 춤을 추듯 펄럭이고 있었다.
이제현은 풍토와 관습과 법률이 다른 원나라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날 밤에 탐스러운 눈 속에 비친 고독한 섬 연경을 보았다. 그리고 연경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군상들을 생각했다. 
연경(燕京)은 북경의 옛 이름이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수도 계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연경이 최초로 중국의 수도로 등장한 것은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가 남경(南京)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이다. 남경은 1013년에 연경으로 바뀌었으며, 1123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金)나라는 이를 다시 중도(中都)로 개칭하였다. 1231년 금나라를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운 원(元)나라는 이곳을 대도(大都)라고 명명하였고, 이 시대 원나라에 의해서 연경은 비로소 제국의 수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연경의 주민 구성은 아주 복잡했다. 요·금의 각 민족 주민들, 원나라를 세우고 연경에 들어온 몽골인, 중앙아시아의 러시아·돌궐·페르시아 족속들, 구라파 상인, 로마 선교사, 티베트의 라마교 승려들, 그리고 고려인들로 거대한 인종시장을 이루고 있었다.
세계의 수도, 연경에서의 첫날 밤은 이렇게 아스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제현과 충선왕. 두 사람은 열두 살의 나이 차는 있었지만 군신 관계를 초월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학우였다. 이제현은 이 날부터 35세가 되는 1321년까지 7년 동안 원나라에서 관직생활을 영위하는 ‘재원(在元) 활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연경의 대보름날 등불놀이 행사

정월 열나흘 밤이 되었다. 
권씨 부인은 문풍지에 울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 지아비와 두 아들에게 신길 버선을 짓고 있었다. 어린 아들 서종은 한 해의 액운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하루종일 연날리기를 한 탓인지 엄마의 무릎에 머리를 뉘고 곤히 자고 있었다.
옆에서 아내의 바느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제현이 불쑥 말을 건넸다. 
“정월 열사흗날부터 열여드렛날까지 등불놀이가 거창하게 벌어진다는 소문이 있던데…….”
“예, 저도 만권당의 관원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어요.”
“부인, 우리도 아이들을 데리고 등불놀이 구경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이제현이 등불놀이 구경을 나가자고 하자, 엄마의 무릎을 베고 잠자코 있던 어린 아들 서종이 일어나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드디어 연경에서 처음 맞이하는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등불놀이는 실로 장관이었다. 거리와 누각, 일반 가옥 할 것 없이 가지가지 빛깔의 초롱을 내달아 연경 성안이 온통 휘황찬란했다. 거기에다 청루 홍루의 주렴(珠簾)을 젖히면서 어여쁜 아가씨들이 한들한들 걸어 나와 난간에 몸을 기대고 보름달을 쳐다보니 연경의 밤풍경이 더욱 환해졌다. 또한 대보름날은 춘절(春節)의 마지막 축제일이라 헌것을 태우고 새것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불꽃놀이 축제도 연경 성안 곳곳에서 벌어졌다. 
정월 대보름까지의 휴식기가 지나고 만권당에서의 본격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에게 고려의 역사나 국정에 대해 여러 가지를 자문했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서 자라 외가쪽 풍속에 익숙한 충선왕은 이제현을 통해 우리 민족의 뛰어난 전통과 우수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고려가 나아가야 할 민족자존의 모습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제현이 지니고 있는 충심은 두 가지였다. 그 첫째는 군주인 충선왕을 잘 받들어서 원나라 조정에 고려의 국격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 두 번째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고려 조정과 백성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충선왕이 만부교사건(萬夫橋事件)에 대해 물었다.
“태조 때에 거란이 낙타를 보내왔는데 만부교 아래에 매어 두고 먹이를 주지 않아 굶어죽게 하였네. 사양해 버리면 그만이지 어찌 굶겨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창업 군주께서는 그 시야가 넓고 사려가 깊어 후세의 사치심을 막으려 한 것 같사옵니다.”
그러자 충선왕이 불교의 융성과 유학의 퇴조에 대해 물었다. 
“우리나라는 옛 문물이 중화와 같다고 일컫더니 이제 학자들이 다 불교를 좇아 문장과 구절을 익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필적할 만큼 융성하였으나, 근래에 산중에 가서 장구(章句)나 익히는 조충전각(雕蟲篆刻, 수식을 일삼는 것)의 무리가 많은 반면 경명행수(經明行修, 경전공부와 심신수련)를 하는 사람의 수효가 적게 된 이유는 바로 무신의 난 때문이옵니다.”
“…….”  
“무신의 난으로 인해 양식 있는 학자들은 생명 보존을 위하여 깊은 산으로 찾아들어 중이 되는 이가 많았으며, 무신의 난 이후 나라가 차츰 문치(文治)를 회복하였으나 학문에 뜻을 둔 인사들이 배울 만한 스승이 없어 중으로 신분을 감춘 학승들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사옵니다.”
“그렇구먼.”
“이제 상왕 전하께서 학교를 넓히고 육예(六藝 : 禮, 樂, 射, 御, 書, 數)를 높이고 오교(五敎, 오륜의 가르침)를 밝혀서 선왕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유학을 배반하고 불교를 추종하겠사옵니까.”

이윽고 충선왕이 인재육성 방안에 대해 묻자 이제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평소에 품고 있던 소신을 피력했다. 

“작년에 원나라에서는 상왕 전하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개혁하여 성리학 경전인 사서(四書) 외에 과제를 주어 논술하게 하는 방식인 ‘책문(策問)’을 시험과목에 포함시켰습니다. 
소신은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의 유학자들도 원나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하옵니다.”
“음, 옳은 말일세. 과인은 반드시 익재 공의 건의를 원 황제께 상주하여 관철시키도록 하겠네.” 

이제현을 일약 고려 문인의 거두로 만든 시문 

이제현이 만권당에 온 지도 어느덧 서너 달이 지난 한가한 봄날이었다. 
충선왕은 조맹부를 비롯한 염복, 요수, 원명선, 우집 등 원나라 학자들과 함께 시를 하나씩 지어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충선왕은 어디선가 들리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한 구절을 읊었다.  
닭 울음소리가 문 앞에 늘어진 수양버들가지 같구나! 
그러자 원나라 학자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리둥절해 했다. 닭 울음소리와 수양버들의 뜻이 연결되지 않는 까닭이었다. 
이에 원나라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용사(用事)의 출처를 물었다.
“어찌 닭 우는 소리가 버들가지 같습니까?”  
충선왕은 중국 학자들의 뜻밖의 질문에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곁에 있던 이제현이 충선왕 대신 나서며 답했다.
“고려 사람의 시에 ‘동트는 새벽에 꼬끼요 길게 뽑는 닭 울음소리,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처럼 길구나’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이는 가늘고 긴 닭의 울음소리를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또한 당나라의 시인 한유(韓愈)도 거문고를 노래하면서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이’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이는 곧 거문고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상왕 전하가 의도했던 시 구절을 다시 한 번 읊어 보겠습니다.” 
아침 해를 맞이하는 지붕 위 수탉 울음소리, 수양버들 가지처럼 하늘하늘 간드러지게 길도다!
‘닭 울음소리가 봄날의 수양버들처럼 가늘고도 길다’는 이제현의 순간의 재치로 위기를 모면한 충선왕은 안도의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흐뭇한 미소로 이제현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나라 학자들은 모두 절로 감탄하며 이제현의 문재(文才)를 칭찬하였다.
“참으로 익재 공의 학문은 깊은 바다와 같이 심오합니다. 고려에 익재 공과 같은 훌륭한 학자가 있으니 고려의 문화 수준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현도 이에 답례를 하였다.
“과분한 칭찬에 송구스럽습니다. 우리 고려에는 저보다 학문이 높은 선비들이 즐비합니다. 앞으로 원나라와 고려의 선비들이 서로 학문을 깊이 교류했으면 합니다.”
시회(詩會)가 끝난 후 충선왕은 만권당의 문사들과 이름난 시인 묵객들과 함께 코끝이 빨갛도록 마셨다. 날이 이미 저물어 해가 용마루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연못에 비친 저녁놀이 물 위에 어른거릴 무렵 그날 시회 모임은 아쉬움을 남긴 채 파했다.
이 일화는 임금의 궁색함을 풀어주고 가히 나라를 빛냈다고 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이날 자신의 학문을 유감없이 뽐낸 이제현은 이후 중국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중국 학자들은 고려를 우습게 여기지 못했다. 마치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이름을 중원에 떨치게 했던 명문장이 바로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였던 것처럼, 이 일화는 이제현을 일약 고려 문인의 거두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원의 연경에 체류하면서 시·서·문예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활동은 원의 고위 관료·학자들과 깊은 교분을 쌓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노린 것은 그런 활동을 통하여 원의 조정에서 수많은 고급정보를 취득하여 고국인 고려 조정에 보내고, 고려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때 원 조정의 대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제현은 그런 외교관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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