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3월15일. 조간신문을 받아든 독자들은 각 신문 1면에 5단통으로 대문짝만하게 실린 광고에 놀랐다. 독자들이 놀란 것은 이 광고의 제목이었다. 광고 제목은 ‘중앙매스컴의 사실과 다른 과장보도에 대해 해명한다’는 것이었다. 이 광고를 낸 주체는 현대그룹의 주축 계열사인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 임직원이었다.당시 10·26 사태 이후 정국은 신군부의 주도하에 살벌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작스럽게 초대형 기업인 현대가 삼성 계열인 중앙매스컴의 보도 내용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른 언론을 통해 반박하고 나선 것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일까.삼성과 현대의 관계는 1980년 초반까지 별 문제가 없었다.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삼성은 주로 경공업과 금융쪽에 치중했고, 현대는 중공업과 건설, 자동차 위주여서 맞부닥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오너인 이병철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이 충돌한 경우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광고가 나온 배경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이 광고가 나오기 전 중앙일보 등 중앙매스컴은 연일 현대건설이 관련된 각종 공사와 중동건설 현장에서 일어난 부실시공, 공사지연 등을 지적하면서 “현대건설의 공사비리로 국가적 손실이 초래되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실제로 보도가 나기 전 중앙매스컴은 “한국과 이란의 유전개발공사가 1979년 3월 준공예정이었으나 현장에서 증류탑공사 사고가 발생해 완공이 1년이나 늦어졌다”는 사실을 보도했다.후문에 의하면 정주영 회장은 중앙매스컴의 이 보도를 보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정 회장은 즉시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과 이춘림 당시 현대중공업 사장을 불러 강력 대응을 주문했다. 이와 함께 두 사람은 사내방송을 통해 중앙매스컴의 악의적 보도를 규탄하는 내용을 전하고 전사원이 대응에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는 것이다.현대그룹 임직원의 공개적인 광고는 파장이 대단했다. 정세도 어수선하던 차에 이같은 광고는 기름을 부은 듯 연일 각종 매스컴들이 두 재벌의 감정싸움을 보도하는 등 최대 이슈가 되었다. 싸움이 연일 확대되자 서울시청에 위치하고 있던 보도검열단까지 나서 조간신문을 미리 보고 자제를 요구해야 할 정도였다. 현대그룹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자 삼성은 최고위층이 나서 진화작업에 열을 올렸다. 당시 TBC 사장이던 김덕보 사장은 정주영 회장과의 직접적인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만남을 거부했다. 할 수 없이 김 사장은 나중에 이명박 사장을 만나 화해제스처를 보냈다. 이건희 당시 부회장도 이명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화해를 청했다.진정국면에 접어들던 두 재벌의 감정싸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일보가 현대건설이 시공한 김포공항 공사 부정사건을 보도하면서 다시 점화되었다. 중앙매스컴이 이런 보도를 하자 현대는 더욱 강도를 높인 문안의 광고를 싣기 위해 전 일간지 1면을 수배했다. 현대종합기획실 명의로 된 두 번째 광고는 “중앙매스컴은 사회의 공기인지 삼성의 공기인지 묻습니다”라는 제목이었다. 눈길을 끈 것은 이 광고에 4·19사건과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의 개인적인 내용까지 담았다. 그야말로 삼성그룹의 핵심부를 향한 정면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두 번째 광고는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다.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김종필 공화당 총재, 그리고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가 나서 만류했기 때문이었다.어쨌든 사건이 터진 후 사흘 뒤인 그 해 3월17일 오전 조선호텔에서 정주영 회장과 이명박 사장, 홍진기 회장과 김덕보 사장 등 화해를 위한 4자회담이 이루어졌다. 당초 이 모임은 삼성그룹측이 신라호텔에서 갖자고 제의했으나 현대그룹측이 조선호텔로 변경했다. 또 만나는 시간도 오전이냐 오후냐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고 한다.두 재벌의 감정싸움이 예상보다는 싱겁게 끝난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분위기가 군사정권의 초기여서 살벌했던데다, 자칫 싸움이 확대될 경우 서로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다는 판단때문이었다. 삼성은 옛 한비사건이 그대로 있었고, 현대 역시 압구정동 아파트사건의 후유증이 우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이 사건이 우여곡절 끝에 봉합이 되긴 했지만 최상부인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간의 완전한 감정해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호텔 회동 후 바로 일본 동경으로 출장을 떠났고, 이병철 회장은 사건 전부터 동경에 머물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동경에서 두 사람이 극적인 회해를 할 것으로 관측했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일부러 만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일은 그 이후 삼성과 현대의 해묵은 감정으로 남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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