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사업적으로 한국 경제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 붙여진 수식어는 ‘신화’이다. 그만큼 그들의 사업상 성공은 척박한 한국 경제의 토양에서 이루어내기에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냈다는 것이다.한국 최고의 기업가로 성공을 거두면서 두 사람은 명문가문을 형성해냈다. 세칭 ‘현대가’와 ‘삼성가’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가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4명의 아들과 6명의 딸을 두었고, 정주영 회장은 8명의 아들과 1명의 딸을 두었다. 지금은 두 사람의 2세들이 대부분 손자까지 두고 있으니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문의 크기만 해도 엄청나다.

직계 4세들까지 따져보면 이병철 회장이 40여명, 정주영 회장이 5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이 출가를 하거나 결혼을 해 형성한 가계도는 실로 한국 최고의 재벌가라 말하기에 충분하다.두 사람은 가문이 번창한 만큼 나름대로 숨은 사연들도 적지 않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장남이 그룹의 대를 잇지 못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정주영 회장은 장남 몽필(당시 인천제철 사장)씨가 1982년 4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정 회장은 장남을 잃은 뒤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 그 이전까지 오직 일과 성공을 위해 매진하던 것에서 다시 한번 인생을 뒤돌아보는 계기를 맞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은 정 회장과 같은 아픔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장남 맹희씨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룹경영에서 배제돼 결국 3남인 이건희 회장에게로 경영권을 넘겨야 했다.

두 재벌가의 후예들

이병철 회장은 자녀교육에 있어 매우 철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정주영 회장은 특별한 매뉴얼이 없이 본인들의 의사에 맡기는 형식의 교육방법을 취했다. 이같은 교육방식의 차이는 현재 두 그룹(물론 현대그룹은 2001년 왕자의 난 이후 분열됐지만)의 경영방식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 배경이 아닐까 싶다.어쨌든 이병철 회장은 박두을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아들(맹희 창희 건희)을 모두 일본에 유학시켰다. 맹희씨는 서울 동성중을 졸업한 뒤 동경 농업대 축산과를 나왔고, 창희씨는 대구 계성중을 나와 서울 보성고-일본 와세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건희씨도 일본 와세다대를 다녔다. 창희·건희씨가 와세다대를 나온 것은 다분히 이병철 회장의 뜻과 관련이 있었다. 이들 중 맹희씨와 건희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뒤 대학원은 미국에서 다녔다. 맹희씨는 미국 테네시, 미시간, 웨슬리대학원 등 세 곳을 다녔다.

건희씨 역시 와세다대를 나온 뒤 미국 조지워싱턴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건희씨는 1968년 중앙일보 이사로 처음 그룹에 입사했다. 차남인 창희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뒤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일본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사랑’이었다. 일본 여성인 이영자씨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의 격노를 샀다. 그러나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3년 결혼에 성공한 창희씨는 한동안 귀국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제일모직 부장으로 입사한 뒤 한비사건을 계기로 그룹을 떠나 새한그룹을 만들었다. 새한그룹은 1990년대 초반 부도나는 바람에 지금은 창희씨 2세들은 경영일선을 떠나 있다.이 회장에게는 막내 아들이 있다. 이름은 이태휘씨다. 태휘씨는 이 회장의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80년대 중반 게이오대를 졸업한 뒤 잠시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로 재직하다가 이 회장이 작고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현재는 동경시내에 있는 빌딩을 관리하면서 살고 있다.

독자적 경영권 분리작업

삼성가는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뒤 2세들간에 모두 분가해 나갔다. 건희씨가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이어가고 나머지 형제들은 사실상 그룹과는 떨어져 독자적인 행보를 하고 있다. 이런 점은 현대가도 마찬가지이다. 현대가의 분열은 창업 1세대에서 먼저 시작됐고, 정 회장이 작고한 뒤 2세들간에 다시 한번 분리작업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거쳤다.정주영 회장의 2세들은 공부보다는 일에 대한 열정이 더욱 높았다. 이는 사업 초기부터 정 회장이 아들들을 회사에 몸담게 해 일찌감치 일을 배우게 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몽필씨가 작고한 뒤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하고 있는 몽구씨는 한양대 공대를 나온 뒤 곧바로 현대자동차에 입사했으며, 그 이후 줄곧 공부보다는 현장업무에서 잔뼈를 키웠다. 그러다가 5남인 몽헌씨가 고려대 상대를 나왔고, 6남 몽준씨는 서울대 경제과를 졸업했다. 정 회장은 평소에도 몽준씨가 서울대를 나온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몽준씨에 대한 편애는 형제들간에도 적잖은 긴장관계를 초래할 정도였다. 실제로 정 회장은 몽필씨가 작고한 뒤 얼마되지 않아 당시 30살을 갓 넘은 몽준씨를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발탁해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몽준씨의 부상은 당시 재계에 큰 화제였다. ‘그룹후계자로 지목된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몽준씨의 부상은 엉뚱하게도 형제간의 경영권을 둘러싼 긴장관계를 더욱 증폭시켜 나름대로 포스트 정주영시대를 향한 작업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 징후는 정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직후인 80년대 후반부터 몽구-몽근-몽헌 등 형제들간에 미세한 경영균열현상이 일어나면서 가시화됐다. 당시 형성된 구도는 몽구=현대정공, 몽근=현대백화점, 몽헌=현대전자, 몽준=현대중공업이라는 공식이었다. 이즈음부터 항간에는 ‘MK사단’이니, ‘MH사단’이니, ‘SY(정세영씨)사단’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았다. 비극이긴 하지만 정 회장이 작고한 이후 표면화된 왕자의 난도 그같은 선상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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