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1988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해였다.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이 이 해에 열렸고, 전두환이 이끌던 제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그의 친구 노태우가 제6공화국을 출범시킨 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해에 경제계에도 큰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제 2민항사업이 시작된 해였던 것이다. 제2 민항사업은 그동안 대한항공에 의해 독점 체제로 되어 있던 한국의 민간 항공사업이 복수 체제로 구성된다는 것은 재계에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제 2민항사업은 경제성을 떠나 사업 자체만으로도 재벌들은 군침을 흘렸다.

특히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재벌들은 제 2민항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나름대로 정권 핵심인사들에게 로비를 벌였다. 5공화국 말기에 교통부에서 극비리에 추진하던 이 사업을 둘러싼 뒷 얘기들도 적지 않았다. 경제계에서는 누가 제 2민항사업자가 될 것인지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정부가 제 2민항사업자를 발표한 것은 1988년 초였다. 그런데 이 발표는 재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업자로 선정된 곳이 예상을 깨고 재계에서 중위권에 겨우 턱걸이하고 있던 금호그룹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금호그룹은 삼양타이어(현재의 금호타이어)를 비롯한 1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랭킹 20위권에 오르내리던 재벌이었다.

물론 호남기업으로는 해태와 함께 대단한 입지를 차지했지만 재계에서는 그리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금호그룹이 느닷없이 제 2민항사업자로 선정되자 온갖 억측들이 뒤따랐다. 어떻게 금호그룹이 제 2민항사업자로 선정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 의문은 이 회사가 1988년 2월 ‘서울민항’(이 상호는 그 해 8월 아시아나항공으로 이름을 변경했다)이라는 상호로 본격 출범했을 때 일부 드러났다. 황인성이라는 인물이 이 회사의 회장으로 영입된 것이었다. 전북 무주 출신인 황 회장은 1947년 육사 4기 출신으로 전두환에 비해 7기 위였다. 그는 1954년 미국 육군경리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미국 육군 지휘관 참모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68년 소장으로서 예편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에 성공했을 때 정치에 입문한 그는 1970년 무임소장관실 경리담당 보좌관, 1973년 국무총리 비서실장, 1973년 제19대 전라북도 지사, 1978년 제 24대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그 후 5공이 출범한 직후 국제관광공사 사장, 1981년 제11대 민정당 소속 진안·무주·장수 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 교통체신위원장을 역임했다. 1985년 제12대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어 1987년 초대 농림수산부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1년만에 옷을 벗고 아시아나항공 출범 직후인 1988년 사장을 맡았으며, 이듬해인 1989년 회장에 취임했다. 아시아나항공 초기에 기틀을 마련하는데 성공한 뒤 1992년에는 또다시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민자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이듬해에는 국무총리에 올랐다.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황 회장이 제2민항사업자 선정에 큰 역할을 했으리란 추측은 당시 재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어쨌든 금호그룹으로 볼 때 제 2민항사업은 엄청난 득과 실을 함께 주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금호가 제2민항 사업권을 따내 그룹의 위상이 한 차원 높은 상황으로 막 이륙을 하려고 할 즈음, 뜻밖의 문제가 불거졌다. 사촌형제간의 경영권 다툼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경영권 문제를 들고 나온 쪽은 당시 박성용 회장의 사촌형인 박상구 당시 도가산업 회장이었다. 이 문제는 제2민항사업권을 따내면서 그룹 전체가 욱일승천하는 모습을 보이던 와중이었기 때문에 그룹 내에서는 여간 골치아픈 사건이 아니었다.

더욱이나 집안문제여서 그룹 전체가 쉬쉬했다.박상구씨가 경영권 문제를 들고 나온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금호그룹의 탄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금호그룹이 창업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이었다. 창업자인 박인천 회장은 원래 일제시절 경찰이었다. 해방 이후 마땅히 직업이 없던 그는 광주에서 1937년형 포드승용차 2대로 택시회사를 차렸다. 의외로 이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게 됐고, 2년만에 그는 광주여객이라는 버스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를 차릴 때 박 전 회장은 자신의 장조카인 박상구씨를 광주여객 지배인으로 기용했다. 박 전 회장은 자신의 동생인 박동복씨도 함께 회사의 전무로 합세시켰다. 이들 세 사람의 동업은 그 이후 30년간 지속됐다.

그러던 중 문제는 1979년에 터졌다. 광주여객을 필두로, 삼양타이어 등 무려 10여개 재벌사로 성장하던 중 70년대 말 경영진 내부에는 약간의 불협화음이 있었다. 박인천 회장이 작고하면서 그룹의 경영권이 박성용 회장에게로 넘어가게 됐고, 이에 박상구씨는 사촌동생과는 별개로 그룹계열사를 떼어내 독립하고 싶어했다. 결국 가족들은 박상구씨가 삼양타이어를 가지고 나가는 것으로 끝을 내려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 불거졌다. 삼양타이어의 경영권을 가지고 독립하려던 박상구씨에게 갑자기 금호측은 경영권반환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