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서울 풍납동의 서울아산병원.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곳에는 정·재계 및 사회 각계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해 구본무 LG 회장, 이웅렬 코오롱 회장, 김원기 국회의장,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노신영 전 국무총리, 한승주 전 주미대사, 차범근 수원삼성 감독 등 2,000여명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애도했다. 이같은 조문행렬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인사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이 회장은 부인 홍라희 여사와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맏사위 임우재 삼성전기 상무보, 이학수 삼성 구조조정본부 부회장,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등을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정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우리나라 경제 부흥을 이끈 창업 멤버 중 한 분이셨다”면서 “좀 더 오래 사셔서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셔야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셔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빈소 앞에서 유난히 오랜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인 이 회장은 유족들과 함께 별실에 들어가 10여분간 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몽준 의원,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 정 명예회장 유족과 10분간 밀담 이유는?

<일요서울> 확인 결과 이 회장과 고 정 명예회장은 한때 투병생활을 같이 한 ‘동병상련’ 처지. 암투병 시절인 지난 2000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암전문병원 M.D.앤더슨암센터에서 나란히 치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이 고 정 명예회장이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1999년 12월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폐암진단을 받고 암제거 수술을 받았다. 이후 다른 부위로의 전이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이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다음달인 지난 2000년 1월 이 회장도 이 병원을 찾았다.

이 회장은 삼성서울병원에서 종격동(우측폐와 좌측폐 사이) 종양 진단을 받은 이후, 폐암으로의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 병원에 입원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입원해 있는 병실은 달랐지만, 자주 왕래하며 서로의 건강을 챙겨주는 등 교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성측도 현재 이같은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회장과 정 명예회장의 유족이 만난)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 당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다”면서도 “정 명예회장과의 특별한 인연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겠냐”고 귀띔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대로 두 사람이 같은 병실에서 치료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는 “우연의 일치로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뿐이다. 병원에서도 거의 왕래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서 치료받으면서 교분 쌓아

그러나 재계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막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사람의 퇴원 이후에도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는 등 가족간에도 수시로 왕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르노삼성차를 포기한 것도 정 명예회장에 대한 배려 차원이 아니겠냐는 소문까지 나올 정도다. 이 회장이 지난 22일 장례식에 부인 홍라희 여사와 장남 재용씨, 맏사위 임우재씨를 대동한 것이나, 정 명예회장의 유족들과 별도로 만나 얘기를 나눈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재계는 바라보고 있다.

삼성측 “건강 이상없다” 해명

한편 정 명예회장이 유명을 달리하면서 ‘동병상련’ 처지였던 이건희 회장의 건강에도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물론 이같은 행보는 사전예방 차원일 뿐 치료 목적은 아니라고 삼성측은 설명한다. 그러나 국내 의료계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증세가 아직 진행 중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암치료 당시 이 회장의 몸에서 발견된 조직은 ‘선암세포’다. 선암세포의 경우 전이가 매우 빠르고 항암치료에도 반응이 늦는 등 예후가 좋지 않다”면서 “이 회장이 아직 완치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지난 2000년 M.D.앤더슨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뒤, 현재는 6개월에 한번씩 삼성서울병원에 들러 진단 및 치료를 병행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측은 이 회장의 증상이 이미 완치됐다는 입장이다. 삼성 구조본 관계자는 “지난해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완치 판정을 받았다. 현재는 정기검진 수준에서 6개월에 한번씩 병원을 다니고 있다”면서 “재발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명했다.


# 대기업 총수들 ‘공적 1호’ 폐암 - 재계 원로들 잇따라 별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에 이어,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까지 지난 23일 별세하면서 폐암에 대한 공포가 또다시 재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수많은 그룹 총수들이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삼성그룹에서는 고 이병철 삼성회장이 폐암 진단을 받은 바 있다. 폐암은 아니지만 이건희 삼성 회장도 지난 2000년 우측폐와 좌측폐 사이에 위치한 종격동 종양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완쾌된 상태라는 게 삼성측의 설명이다. SK그룹도 창업주 최종건 선대 회장이 73년 폐암으로 작고한데 이어, 동생인 최종현 회장 역시 지난 98년 폐암으로 별세했다.

최근에는 최종건 회장의 맏아들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같은 상황에서 지난 23일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도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재계에 또다시 ‘폐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병원을 계열사로 두고 있는 일부 그룹들은 폐암에 대한 별도의 인력 충원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 의학계의 한 관계자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등 건강관리에 철저한 것으로 알려진 대기업 총수들이 유독 폐암에 약한 명확한 원인은 나오지 않았다”면서 “현재로서는 흡연과 유전적 요인이 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재벌 총수들은 왜 폐암에 많이 걸릴까. 전문의들에 따르면 폐암의 발병원인은 지나친 흡연이나 과로 등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업무상 과로가 많은 재벌총수들의 경우 폐암에 노출될 확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창업 1세대의 경우 젊은 시절에 기업을 창업할 당시 주로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폐암 확률이 높은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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