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떨고 있니?” 재계 관계자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세칭 ‘삼성X파일’ 사건의 여파가 재계 전반에 번질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난달 말 수 백개의 안기부 도청 테이프를 추가로 입수했고, 그 테이프에는 삼성 이외에 다른 그룹에 관한 내용도 포함돼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와 관련해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아끼고 있지만, 사실 그룹 내부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박하다. H그룹의 내부 관계자는 “테이프가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분위기가 재계 전반에 흐르고 있다”며 “삼성의 뒤를 이어 어느 그룹의, 어떤 내용이 공개될 것이냐에 촉각이 곤두 서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요즘 떨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재계의 몇 몇 ‘경복고- 고려대 출신’ 인사들이다. 이들이 요즘 좌불안석인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고 있는 오정소 전 안기부 차장이 이 학교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몇몇 경복고-고대 출신 좌불안석

오 전 차장은 지난 1971년 국정원(당시 중앙정보부)에 공채 입사한 이후, 인천지부장, 대공정책실장, 제 1차장을 역임한 사람. 공직에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직함은 국가보훈처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은퇴를 한 이후에도, 사실상 안기부(현 국정원)의 비밀 도청팀 ‘미림팀’을 진두지휘했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알려졌다. 오 전 차장은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씨의 최측근 인사로 꼽히는 사람. 특히 안기부의 도청이 한창이었던 무렵, 오 전 차장의 임무는 ‘재계 관리’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실제로 국내 재계를 관리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여러 루트를 통해 이런 의혹들은 끊이질 않았다. 지난 97년 4월 사건도 그랬다. 당시 김현철씨가 각종 이권사업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검찰은 김 씨의 ‘재계 인맥 관리책’ 자격으로 오 전 차장을 조사한 적이 있다. 박지원 전 장관의 현대 비자금 수수의혹 사건에도 그의 이름은 언급됐다. 이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김영완(현재 해외도피 중이다)씨는 오 전 차장과 대학 선후배였다. 오 전 차장이 재계와 어느 정도로 깊숙이 관여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몇 굵직한 사안에서 그의 이름은 자주 거론됐다.

C회장이 사무실 얻어줬다 소문 파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몇 몇 재벌 총수들은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열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오 전 차장 역시 고향이 이북이어서, 같은 학교 출신의 선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도 전해진다. H그룹의 C회장은 그와 친분이 유달리 각별한 것으로 전해진다. C회장은 경복고, 고려대 출신으로 오 전 차장에게는 고등학교, 대학교의 각별한 후배가 된다. 오 전 차장은 안기부 차장으로 근무할 당시부터, 고등학교와 대학 두 군데 모두 후배인 C회장과 종종 식사를 하는 등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 전 차장이 지난 97년 공직을 물러난 이후, 그는 C회장의 도움으로 강남에 사무실까지 얻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업계에서는 당시 그가 이 사무실에 머물면서, C회장이 이끌고 있는 그룹의 비공식적 고문 역할을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지만 이에 대해 H그룹은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며 반박했다. K그룹의 L회장도 오 전 차장과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오 전 차장 거쳐 다른 윗선과 연결됐나

L회장은 그의 대학교 후배인데, 재벌 2세들의 모임에 그를 데리고 나갔다는 얘기가 나돈다. L회장은 재벌 2세 중에서도 유달리 끼리끼리 커뮤니티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그가 속해 있는 재계 모임도 줄잡아 10곳 가까이다. L회장은 이 중에서도 고대 출신들이 주축이 되는 모임에 자주 나갔었는데, 평소 안면이 있었던 오 전 차장을 에스코트 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L회장은 지난 97년 김현철의 측근이었던 P씨에게 2억원을 건넨 혐의로 조사를 받기도 해, 당시 오 전 차장 주변 사람들과도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또 다른 H그룹의 C회장도 L회장과의 친목 모임에서 오 전 차장과 친분이 두터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C회장은 L회장보다도 연배가 7~8년 아래여서 평소 모임에 자주 따라다녔는데, 오 전 차장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C회장은 오 전 차장이 까마득한 대학 선배인데다가, 재계 전반의 내용을 비교적 잘 알고 있어 여러가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는 후문. S그룹의 L회장도 오 전 차장과 함께 어울린 대표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회장들은 주로 1960년을 전후해 태어난 이른 바 386세대들인데, 오 전 차장과 개인적으로나 모임에서 종종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동문회 모임이 별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 전 차장의 역할이 ‘재계 관리’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 회장들이 그에게 로비를 하거나 중요 정보 등을 편법적으로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들의 설명. 민감한 시기인 만큼, 이들에게는 친분이 있다는 것조차 부담일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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