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회장의 ‘큰아들 사랑’은 대우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신년 인사 자리에서 연설을 하다 말고 눈물을 흘리거나, 연설 도중 내려온 일화는 아직까지도 대우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불도저’를 연상시키는 김 회장도 결국에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우리네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김 회장은 큰아들인 선재씨가 생각날 때마다 적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지난 91년 증권가를 발칵 뒤집어놓은 ‘김우중 사망설’도 사실은 이 때문에 비롯됐다는 게 김우일 전 대우구조조정본부장의 설명이다. 지난 91년 여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가 발칵 뒤집혔다.

(주)대우를 비롯해 대우중공업, 오리온전기, 경남기업, 대우통신 등 그룹 계열사나 관계사 주식이 이유도 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룹구조조정본부로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주거래은행인 기업은행은 물론이고, 해외채권단, 심지어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걸려왔다. 이들의 우려는 한결같았다. 대우그룹이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사는 멀쩡한데 대우 계열사만 주가가 떨어지느냐는 게 이들의 지적이었다. 해외 채권단들도 점차 채권을 돌리겠다며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주식 시장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대우 계열사 주가가 떨어질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다른 회사 주가는 멀쩡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습니다.”즉시 비상대책반이 꾸려졌다. 계열사별로 원인 파악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원인 파악을 위해 동분서주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모두가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김 전 본부장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고 회고한다. 문제는 이런 급박한 때 김 회장조차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다. 청와대나 주거래은행은 원인을 빨리 찾아내 보고하라고 아우성이지만, 해외 출장을 나간 김 회장은 이같은 사실은 아는지 모르는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김 회장이 대우 아메리카 현지법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동행한 비서에게 (김 회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아무일 없다’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관련 회사 주식은 연일 바닥을 쳤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만 수백만주의 매물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김 전 본부장은 분명히 김 회장의 신변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비서는 “아무일 없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반복할 뿐 좀처럼 연결을 시켜주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이틀 전에 미국 유학 중이던 큰아들 선재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귀띔했다.

김 전 본부장은 김 회장에게 이 사실을 공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짧은 답변만을 전달받았다. 결국 김 회장은 큰아들 선재씨의 죽음을 공식 발표했고, 주가는 거짓말처럼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기간이 일주일 정도 된다. 불과 일주일만에 계열사 주가는 거의 반토막이 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증권가에서는 큰아들 선재씨가 아니라 김 회장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답니다. 다른 회사는 멀쩡한데 대우 계열사의 주가만 빠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어야 하겠죠. 그룹의 경비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동우공영이 바로 소문의 진원지였습니다.”김 전 본부장에 따르면 통상적으로 출가를 하지 않은 자식이 죽으면 화장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김 회장은 화장을 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대신 동우공영 사장을 통해 선재씨를 안장할 묘터를 알아보라고 은밀히 부탁했다.

동우공영 사장은 즉시 풍수지리사를 불러 묘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풍수지리사가 의혹을 품었고, 이 소문이 와전되면서 ‘김우중 사망설’로 번진 것이다.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김 회장 슬하에는 미혼의 자녀뿐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묘자리를 찾고 있다면 틀림없이 결혼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이라면 김 회장 외에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이는 내부 사정을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유추가 가능합니다. 이 풍수지리사의 생각이 증권가에 와전되면서 결국엔 ‘김우중 사망설’로 번진 것이지요.” 선재씨의 유해는 결국 경기도 안산농장에 안치됐다. 농장 이름도 선재씨의 이름을 딴 ‘선재 농장’이라고 지었다. 그러나 지난 2002년 분묘가 안치된 경기 안산농장이 수출보험공사의 의뢰로 경매에 부쳐지면서 김 회장은 또 한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는 후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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