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한편, 당시 고려나 남송(南宋)의 속사정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입장이었다. 
고려는 자주권을 상실한 나라이고, 남송은 망국의 한을 품은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이 두 나라 지식인의 고뇌와 화두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몽골족이 무력으로 남송을 멸망시켰지만, 실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남송의 한족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한족들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이민족의 지배로 인해 새로운 문화 창조보다 복고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 복고의 중심에 왕희지를 들고 나와 송설체를 완성시킨 조맹부(趙孟)가 있었다.
조맹부는 호는 송설(松雪)이고 남송 왕실의 후예로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에서 태어났다. 그는 망국의 한을 안고 방황하다가 1286년 원나라 세조에게 발탁되어 등용되었다. 시(詩), 서(書), 화(畵), 인(印)에 모두 능했는데, 관직이 한림학사, 영록대부에 이르렀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모방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서거정(徐居正)이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충선왕이 귀국하면서 글씨와 그림, 서적 1만여 권을 갖고 돌아와 조맹부 글씨가 우리나라에 퍼졌다”라고 할 정도로 송설체가 유행했으며, 조맹부의 서법은 이후 안평대군의 독특한 송설체로 발전하게 된다. 
충선왕과 조맹부 두 사람은 모두 표면상으로는 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 울적한 동병상련을 앓고 있었다. 그러한 두 사람에게 서화는 공동의 기쁨이며 예술적 미의 추구였다.
이들은 모두 불교에 심취하여, 심령을 위로하고 해탈을 추구했다. 훗날 조맹부는 충선왕과 헤어지면서 이별을 아쉬워하는 석별의 정을 <유별심왕>이란 시로 남긴다. 

함께 고려의 인삼주를 음미하고, 
화원의 작은 길을 걸으며 작약꽃을 감상했었네. 
연경의 화려한 집에서 향을 태우며, 
함께 병풍에 붓을 휘둘러 서화를 그렸었지.  

쉽게 만나기 힘든 산과 바다처럼 서로 다른 배경, 관습, 논리 등의 이유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들이 서로 만나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만남을 ‘산과 바다의 만남(山海之會 산해지회)’이라고 한다. 이제현과 조맹부의 만남이 그러했다. 약관 28세의 이제현은 자신보다 33살 연상인 61세의 조맹부와 6년 동안 교제하면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으며, 조맹부의 서체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풍류는 영화의 봄을 생각하게 하고 
글씨로 남긴 자취 일백 번 변해도 새로워라.
천년 뒤 요행히도 참모습을 만났는데
더구나 집안에 위부인 있단 말 듣는구나.

‘영화의 봄’이란 서성(書聖)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진나라의 왕희지(王義之)가 <난정서(蘭亭序)>를 쓴 영화 9년(353)을 말하고, 마지막 구절은 왕희지가 위부인(衛夫人)의 서첩을 놓고 글씨를 배웠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짓말로 왕과 정인을 떼어놓다

해가 바뀌어 1315년(충숙왕2). 
이제현은 선부의랑(選部議郞, 정4품)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해 가을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임명되어 선부의랑을 겸임하게 된다.
충선왕에게는 깊이 정든 원나라 여인이 있었다. 충선왕에게 갑자기 고려에 다녀올 일이 생겼는데, 그 정인(情人)이 따라가려고 고집을 피웠다. 충선왕은 정인을 달래주려고 만권당 정원인 어은에서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삼았다. 그러나 충선왕이 밤낮으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제현을 시켜서 다시 정인에게 가보게 하였다. 이제현이 가보니 그 여자는 다락 안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絶句) 하나를 지어주는 것이 아닌가.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贈送蓮花片 증송연화편). 
처음엔 분명하게 붉더니(初來的的紅 초래적적홍), 
가지 떠난 지 이미 며칠인데(辭枝今幾日 사지금기일),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憔悴與人同 초췌여인동).

절구를 받아 쥔 이제현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충선왕이 정에 약했고 사랑에 빠지면 몰입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7년 전 역동 우탁 선생이 충선왕에게 지부상소를 올린 일도 이제현의 결심을 돋우었다.
이제현은 돌아와 거짓말로 충선왕에게 아뢰었다.
“그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찾아도 없었사옵니다.”
이에 충선왕은 크게 뉘우치고 땅에다 침을 뱉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을 쏟은 것이 허망한 일이었구나.”
다음 해 상왕의 생신인 경수절(慶壽節)에 이제현이 충선왕께 술잔을 올리고는 뜰 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려 죄를 줄 것을 청했다.
“소신,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충선왕은 어리둥절하여 그 연유를 물었다.
“익재, 그 무슨 황망한 말인가?”

이제현은 충선왕의 정인이었던 그 여자가 쓴 시를 올리고는 그 때의 일을 소상하게 아뢰었다. 이에 충선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만약 작년에 과인이 그녀의 시를 보았다면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익재가 나를 위해 일부러 말을 다르게 꾸몄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충선왕과 그 정인의 연사(戀事)에서 보듯이, 이제현은 만권당에서 득의에 찬 세월을 보냈다. 그는 중국 문화와 세계 각국의 문명을 전면적으로 접한 후 학문적·사상적인 진일보를 이루었다. 
그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성리학을 ‘실학’이라 하고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을 ‘참된 유자(眞儒진유)’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현은 성리학을 기초로 한 ‘제왕학’을 써서 주군인 충선왕에게 올곧이 바쳤다. 그 책이 사회개혁서인 <사찬(史贊)>이다. 이제현은 이 책에서 이렇게 밝혔다.
《맹자》에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제로부터 시작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사회 개혁의 핵심은 경제가 가장 중요하다. 또한 최승로(崔承老)의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는 고려 왕조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이를 받아들여 실천한 성종(成宗)의 업적은 왕도 정치의 한 모범이다. 
원나라 학자들은 모두 왕족과 교유하였다. 이제현도 이들과 교제하며 학문이 더욱 증진되어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유명했다. 특히 외교 문서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동양에서 주목받는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원나라의 왕족, 제공(諸公)과 문인들은 이제현의 학문에 대해 칭찬과 찬탄을 그치지 않았으며, 이제현의 문집을 출판하고 그의 작품을 곧잘 인용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처럼 이제현은 ‘시 한 수에 술 한 잔’이라는 말대로 마치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끝없이 시를 쓰며 노래를 읊어 자신의 뛰어난 문재(文才)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원나라에서 고려 조정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며 늘 고려를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 박충좌, 최해, 안축과의 추억이 어린 <송도팔경(松都八景)> 등의 시를 지어 고려의 산수를 원나라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만심징철청동경(萬尋澄澈靑銅鏡)    
만 길의 맑은 물 청동의 거울이요  
천척위이백옥홍(千尺白玉虹)    
천 척을 두른 백옥의 무지개라.  
괴저고금류부진(怪底古今流不盡)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흐르는 게 이상한데
층암직상시용궁(層巖直上是龍宮)  
층암의 바로 위는 이 용궁이라네.
                  <송도팔경시> 中  ‘박연폭포’

설앞강변옥(雪壓江邊屋)    눈은 강변가의 지붕을 덮었고
풍명포구색(風鳴浦口穡)    바람은 포구의 돛대를 울린다.
(중략)
고가예성강(高歌禮成江)    목청 높여 예성강곡 한 곡 부르니
장단하두강(腸斷賀頭綱)    하두강의 창자(애간장)가 끊어지누나.

                  <송도팔경시> 中 ‘서강풍설’ 

<송도팔경>은 자하동으로 중을 찾아가다(紫洞尋僧 자동심승)·청교에서 객을 전송하다(靑郊送客 청교송객)·북산의 안개비(北山煙雨 북산연우)·서강의 눈보라(西江風雪 서강풍설)·백악의 비 갠 구름(白岳晴雲 백악청운)·황교의 저녁놀(黃橋晩照 황교만조)·장단석벽(長湍石壁)·박연폭포(朴淵瀑布) 등 송도의 절경을 노래한 8편의 시를 말한다.

대륙을 여행하며 원나라(중국)를 배우다

인생은 긴 여행과도 같다. 생명이 탄생하여 죽음에 이르는 80평생의 유한한 여행이 우리의 인생이다. 여행이란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다. 이제현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듯이 한평생을 여행을 꿈꾸며 살았다. 그는 27세 되던 해에 처음 연경에 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 개경과 연경을 여덟 차례나 오간다. 
그뿐만 아니다. 이제현은 폭설과 빙판으로 얼룩진 길, 황사바람이 이는 황량한 모래벌판, 신라 고승 혜초가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명명한 공포의 타클라마칸 사막 등 살찐 닭의 모양과 같은 중국 대륙을 세 차례나 속속들이 누비며 횡단한다.  
병진년(1316, 충숙왕3) 봄이 돌아왔다. 만권당에서 맞게 되는 두 번째 봄이었다.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즐거움 중 하나는 사시사철 변모하는 정원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철따라 만개하는 매화, 벚꽃, 해바라기, 국화, 동백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이제현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이제현은 대자연이 주는 광활함이 목마를 때면 만리장성에 올라 북방에서 밀려 내려오는 유목족들의 함성을 들었으며, 춘풍에 마음이 심란해지면 아름다운 중산공원(연경성 북쪽에 위치)을 거닐며 헝클어진 마음의 실타래를 풀곤 했다. 저녁이 되면 중국의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의 일생과 항우와 우미인(虞美人)의 사랑이야기인 <패왕별희(覇王別姬)> 등을 노래한 경극(京劇)을 관람하며 중국의 역사와 발자취를 되돌아 보았다. 밤이 이슥해서는 야시(夜市)에 나가 민초들의 일상을 체험하곤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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