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한여름 어느 날, 60대 중반인 지인과 점심 식사를 같이 한 후 함께 사무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무실이 있는 건물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시원한 생수를 지인에게 건네는 게 아닌가. 사무실로 돌아온 후 그 지인에게 물어보았다. “생면부지의 아주머니가 왜 생수를 주던가요?” “내가 부처상이라 그랬다는군요.”

사실 그 지인은 누가 봐도 부처 같은 용모를 지니고 있다. 용모만 그런 게 아니다. 실제로 그는 남들에게 잘 베푼다. 사람을 가리지도 않는다. 전화도 참 많이 걸려온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부탁하는 전화다. 사람 좋은 지인은 그 부탁들을 다 들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손해 보는 일도 많다. 그래도 그는 괜찮다고 한다. “베푸는 게 낫지요.” 그에게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는 종교의 가르침인 내려놓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그는 내려놓음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필자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라 열차 안은 승객들로 매우 북적거렸다. 자리에 앉아서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금방 자리가 생겼다.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승객이 내렸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

그러나 그 행운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바로 앞 옆에 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앞에는 한 아주머니가 연신 전화를 하고 있었는데, “전도사님” “집사님” 하는 걸 보니 교회 구역장인 듯했다. 전화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아주머니는 끝내 그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결코 일어날 의지가 없음을 확인한 필자는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부처상의 지인과는 달리 교회 구역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예수의 가르침인 내려놓는 방법을 아직은 터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직은 베풂과 내려놓음이 동의어인 줄 모르는 듯했다.

오해하지 마시라. 필자는 지금 특정 종교를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종교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예를 들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됐을 뿐이다.

신자들의 영혼을 치료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수 개월간 친자 의혹 등으로 퇴진 압박을 받아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전격 사퇴했다고 한다. 사퇴 날짜를 번복했다가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자 원로회의 인준을 하루 앞두고 “산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단다.

기독교 대형교회인 명성교회도 부자 세습 문제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김삼환 원로목사의 아들인 김하나 목사가 청빙되면서 부자세습 논란이 일었는데, 최근 총회 재판국이 김 목사 손을 들어주자 청빙결의 무효표를 던진 재판국원 7명 중 6명이 사임서를 제출하는 등 큰 후폭풍이 일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교회로 꼽히는 소망교회의 김지철 목사는 자신의 SNS를 통해 세습 논란을 일으킨 김삼환 목사에게 “교단을 떠나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왜 이런 일들이 속세와는 구별된 종교계에서 일어날까.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반대말로 ‘노블레스 말라드(noblesse malade)’라는 게 있다. ‘병들고 부패한 귀족’이라는 뜻이다. 그 악취가 정치계는 말할 것도 없고, 경제계, 문화계 등 도처에서 진동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향기가 ‘방향제’ 역할을 해주고는 있지만, ‘노블레스 말라드’의 악취가 신성하고 깨끗해야할 종교계에까지 스멀스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