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밀 검사결과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결과가 나와 치료를 해야 할 경우를 감안할 때 당장 국내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성 관계자는 “수일 내에 이 회장이 돌아오기는 힘들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미국 휴스턴 MD앤더슨 병원 체류 보름이 넘어서고 있다. 이 회장의 해외장기체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 회장의 공백을 누가 메울지에 대해 ‘설왕설래’ 말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재용 전면에 나서나

특히 이 회장이 삼성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따져볼 때 공백을 메울 인물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를 떠올리고 있다. 재계일각에선 삼성에서 이 상무의 역할이 ‘아버지의 공백’을 계기로 점차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고 이병철 회장이 암 수술을 받으러 일본으로 가기 직전에 후계자로 이건희 회장을 지명했던 한 세대 전의 상황을 따져 볼 때 이 상무의 역할 확대 가능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이건희 회장에 대한 최종 검진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이 회장의 건강상태에 대해 특별한 문제점이 드러난 상태는 아니다. 이와 관련해 삼성 고위 관계자는 “그 동안 장기간 항암치료에 따른 혈소판 이상과 목 부위에 일부 이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5년 전 림프절암 치료를 받은 후 지금까지 재발되지 않아 일단 완쾌 판정을 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과거 이병철 회장 때와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룹 내에서 이 상무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지난 추석 연휴 기간 중 이 회장을 문병하고 돌아온 이 상무가 구조본 수뇌부와 회동하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 상무는 1968년생이니 올해로 서른여덟이다. 내일모레면 불혹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건희 회장의 그늘에 갇혀 있어 ‘배우는’ 후계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동안 이 상무 본인은 스스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아버지 이건희 회장과 삼성의 구조본 소속의 CEO가 엄격한 선생님이자 ‘종가 집 살림을 가르치는’ 시어머니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구조조정본부는 그의 수족인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관리·감독기구다. 구조본은 이 상무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는 사람까지 일일이 파악한 후 계속 관계를 유지할지를 결정할 정도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번 이건희 회장의 장기간 외유로 이 상무의 운신 폭이 상당히 넓어졌다는 주장이다.

이 상무에게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삼성측의 핵심 간부 중 한 사람은 “삼성은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이 거대한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 이재용 상무다. 전문경영인은 이건희 회장의 바통을 받아 삼성을 끌고 갈 구심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지 모른다. 오너가 아니면 그 정도의 장악력을 발휘할 수도 없고 그룹 내의 수많은 CEO들을 다룰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재용 상무의 집무실은 서울 중구 태평로 소재 삼성본관 빌딩 25층에 위치한다. 바로 위층인 26·27층에는 삼성기업구조조정본부(구조본)가 있고 28층에 이건희 회장의 집무실이 자리한다. ‘물리적’ 위치로만 봐도 이 상무의 ‘상징적’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한눈에 파악된다. 이 상무는 25층 집무실에 오전 8시전에 출근해서 오후 5~6시경 퇴근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회장의 외유이후 퇴근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현재 구조본 간부들에게 수시로 이메일 보고를 받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이 상무는 사무실에서만 이메일 보고를 받고 있지 않다. 이 상무가 타는 현대 에쿠스에는 첨단모바일 시스템이 깔려 있어 승용차로 이동 중에서도 긴급한 이메일 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비상체제라 새벽에도 이메일 보고를 보내고 읽어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본 수뇌부와 회동 잦아

사실 이 상무는 그동안 후계자 공부 외엔 구체적인 업무를 맡아 추진하고 있지는 않았다. 구조본을 통해 이 상무의 업무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은 “전자산업 전반에 대한 시각을 넓히고 있고 삼성전자의 미래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는 추상적인 답변이 전부다. 이 상무에 대해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구조본측의 입장이 반영된 면도 어느 정도 있지만 사실 경영자로서의 기본적인 학습에 치중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특수한 상황에서는 이 회장의 장남인 이 상무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걸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이학수 부회장, 김인주 사장, 김준 비서팀장, 이순동 홍보팀장 등 구조본의 수뇌부와 수시로 회동하며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있다. 지난 추석때 병문안을 갔던 이 상무가 미국에 있는 이 회장의 뜻을 그룹 계열사들에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이 상무의 역할은 총 3가지로 나뉘어 지고 있다. 먼저 X파일에 대한 검찰 수사와 국감증인채택에 따른 대응방안을 구조본과 마련하는 것이다. 검찰수사의 경우, 구조본 법무팀 실장인 이종왕 사장과 긴밀히 공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감증인채택도 이 상무가 해결할과제로 남아 있다. 특히 지난 22일 천정배 법무부장관이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장기간 귀국하지 않으면 국제 사법공조를 통해서라도 송환할 뜻을 비쳐 파장이 일고 있다.마지막으로 실추된 그룹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그룹 고위 관계자는 “구조본 개편이나 독립경영 강화, 대북사업 협조 등 대외이미지 개선 작업은 사태가 좀 진정되면 검토해볼 수 있는 문제” 라며 “지금은 눈에 띄는 행동을 하면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무조건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이 관계자는 “이 상무의 역할은 차기 총수로서의 후계자라는 상징적인 역할이 강하겠지만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 회장과 삼성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


# 외국인 상위주주 ‘뜻’ 모으면 후계자 바뀔 수도 있어 - 이재용 ‘차기총수’자리 오를 수 있나?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구조본 간부들에게 이재용 상무의 ‘차기총수’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면 여지없이 똑같은 대답을 풀어놓는다. 아직은 더 배울게 많지만 언젠가는 이건희 회장의 뒤를 이을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 천편일률적이면서 너무나 확신에 찬 답변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상무가 삼성의 ‘차기총수’로 오르지 못할 가능성은 전무(全無)한 것일까. 특히 이 회장의 와병설과 미국장기체류로 이 회장의 공백이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는 지금, 삼성의 후계구도에 대한 변화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건희 회장의 최측근이자 구조본의 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은 “주식회사에서 주주들의 동의 외에 뭐가 더 필요한가. 이재용 상무가 그룹 회장이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결국 주주들이 결정할 일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결국 모든 결정권은 주주들의 몫인 셈이다. 주력사인 삼성전자의 경우 이 회장이 동원할 수 있는 지분은 22% 안팎에 불과하다. 여기엔 이 회장을 포함한 일가의 지분과 다른 삼성 계열사들이 보유한 지분 등을 모조리 합한 것이다. 반면 외국인들의 지분율은 꾸준히 50%가 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외국인 상위 주주들이 뜻을 모으면 이건희 회장의 의지와 상관없이 후계자를 갈아치우는 극단적인 시나리오도 예상해 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장남 이재용 상무에게 그룹총수자리를 물려주겠다는 선택을 했다. 이에 대해 반발할 세력은 이 회장에게 버금가거나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주주들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재용 총수’를 문제 삼는 영향력 있는 주주가 없다.이유는 단 한 가지 ‘삼성의 놀랄만한 실적’이다.

이건희 회장이 고 이병철 회장에게 물려받은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변모시켰다는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다. 주주들 역시 이 회장의 ‘오너경영’에 아직까지는 흡족해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이다. 이재용 상무의 경영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과거 이 상무가 주도적으로 펼쳤던 e비즈니스의 실패를 예로 든다. 삼성계열사들은 이 상무의 인터넷 사업들을 대신 인수하여 총 387억여원의 손실을 대신 떠안기도 했다. 때문에 주주들의 묵시적 동의가 최악의 경우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 재계의 시각이다. 따라서 이 상무가 탈 없이 삼성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선 과거의 실패를 보상할 만한 경영능력을 먼저 보여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 이재용과 구조본 손발 안 맞나?

“서울 가서 다음주 쯤 (이건희 회장의 용태)얘기할 거니까….”(이재용 상무, 이건희 회장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에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이 상무의 문병 이후 불거진 이 회장 거취 표명설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구조조정본부 차원에서 현재로서는 발표할 만한 사안은 없다.”(구조본 관계자, 이 회장의 거취 표명설이 논란에 휩싸이자).손발이 안 맞은 건가. 이 상무의 돌출행동인가. 이 상무의 이 회장에 대한 건강상태 발표가 하루만에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언론 발표에 따른 사전 조율 없이 말한 내용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지 말아 달라는 삼성측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구조본 내에서도 이건희 회장의 장기체류는 그만큼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이번 상황은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이재용 상무와 구조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라는 주장도 재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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