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노무현 대통령이 중앙언론의 경제부장단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 날 간담회 자리에서는 최근 재계의 화두인 8·31 부동산 대책과 소주세율인상 등 세제 개혁에 관한 얘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정작 이 날 가장 관심이 집중됐던 화두는 다른데 있었다. 바로 금산법 개정안에 관한 것이었다. 금산법은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의 약자인데, 지난 97년 1월 정부가 금융산업의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기 위해 제정한 법률. 여기서 말하는 금융기관이란 은행법에 따라 설립된 기관으로 장기신용은행, 증권회사, 투자자문회사, 신탁회사 등을 총망라한다. 원래 금산법은 금융사를 이용해 국내 대기업의 2세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등 편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데 태클을 걸기 위해 제정됐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대기업들은 오히려 이 법률을 교묘히 이용, 지배구조를 공고히 해온 것이다. 삼성그룹이 대표적이었다.

삼성은 삼성생명, 삼성에버랜드 등을 이용해 편법적 세습체제를 갖춰나갔다. 최근 국회에서는 삼성의 이런 태도를 두고 금산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이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언급을 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얘기.“최근 금산법 개정 논의 사태를 보면 삼성의 대응태도에 문제가 있다. 지배구조 개선이 사회적 공론이라면, 삼성은 이를 수용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직접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노 대통령의 심기를 전해들은 삼성으로서는 이래저래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삼성은 이외에도 세칭 ‘X파일 파문’과 이건희 회장 부부의 ‘동반출국’ 으로 인해 국민들의 눈총을 한몸에 받고 있는 터였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직접 들은 얘기가 아니어서, 뭐라 답변할 처지가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부담스러운 분위기다.

그러나 이 관계자가 이처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그동안 노무현 대통령과 삼성의 관계 개선이 어느 정도 이뤄진 시점에서 벌어진 발언이라는 점 때문인 듯 싶다. 노무현 대통령과 재벌그룹.사실 지난 2002년 연말,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이 된 직후 재계에는 불안감이 역력했다. 평소 ‘안티재벌’, ‘친노조’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낸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하고 난 뒤 벌어질 여파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 정부와 재벌그룹간의 초창기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변했다. 노무현 정부와 재벌그룹의 지난 3년 반 동안의 평점을 매겨보자면 이렇다. 노 정부와 이건희 회장과의 관계는 ‘C’학점, 정몽구 회장과는 ‘B’학점, 구본무 회장과는 ‘A’학점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과 삼성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이런 평가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지난 2002년 말.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 삼성그룹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참여연대는 이건희 회장의 자녀와 임원들에 대한 편법 세습 문제 등에 대해 소송을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친노조, 반재벌’ 성향이었던 노 대통령으로서는 편법 세습의혹의 중심에 있는 삼성그룹을 좋게 바라볼리 없다. 더구나 삼성그룹은 국내의 거의 유일한 ‘무노조 재벌기업’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6월 1일.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한 이후 처음으로 삼성, LG, 현대차 등 주요 기업 총수들과 ‘삼계탕 오찬’을 가졌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물론 참석했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노사 문제를 푸는 해법은 바로 대화와 법”이라고 말했다. 노조가 없는 삼성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고, 또 그만큼 뜨끔한 말이기도 하다. 노 정부와 삼성의 관계는 말 그대로 ‘찬바람 쌩쌩’이었다. 정부와 국내 최대 기업의 관계가 이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정부와 재계의 사이도 멀어졌다.

삼성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려는 찰나, 노 정권과 삼성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삼성그룹이 지난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수십억원의 비자금을 건넸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국내 재벌그룹의 ‘불법 대선자금 파문’이 바로 이것이다. 당시 이 사건은 ‘차떼기’, ‘무기명 채권편법’ 등 각종 얘기를 쏟아냈는데, 삼성그룹은 이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노무현 집권 첫 해인 지난 2003년, 정권과 이건희 회장의 관계는 말그대로 ‘최악’이었다. 이들의 관계가 슬슬 화해무드로 돌아선 것은 집권 2년째 들어서다. 지난 2004년 9월.노무현 대통령은 재벌그룹의 총수들과 함께 러시아 출장 길에 올랐는데, 이건희 회장도 함께였다. 이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업계에서는 이때 일종의 화해 무드가 형성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이들의 관계가 점점 변화됐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서 정권과 이건희 회장과의 관계는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사실 다른 재벌그룹이 시샘을 할 정도로 친밀해보이기까지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인 권양숙 여사와 함께 지난 3월, 삼성 계열사인 ‘삼성리움미술관’(한남동에 위치)을 방문하는 ‘깜짝쇼’를 연출했다. 노 대통령이 이 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는데,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가 대통령 부부에 대해 깍뜻한 예유를 갖췄다고 한다. 재계에서는 정부와 재벌그룹 간에 본격적인 화해무드가 조성됐다며 반겼다. 노무현 대통령도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노 대통령은 ‘리움 방문’ 2개월 뒤인 지난 5월, 지난 대선자금 일을 잊어버리자며 악수를 청했다. “지난 대선 자금 문제 등을 되짚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충격 발언은 이어졌다. 지난 7월.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원천은 이미 대기업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에 재계는 환호했고, 노동계는 비난했다. 이렇게 정부와 이 회장과의 관계는 ‘핑크빛 미래’를 예고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문제의 싹은 그 사이에도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삼성의 ‘X파일 파문’이었다. 이 사건은 이건희 회장의 처남인 홍석현 전 주미대사와 이 회장의 ‘오른팔’인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의 녹취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일어난 파문이다. 이후 노 대통령의 태도는 싸늘해졌다. 정기 국회의 국감장에서는 이건희 회장을 이번 사건의 ‘증인’으로 채택했고, 삼성에 대한 국회의원의 총공격이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도 불과 몇 개월만에 바뀌었다. 급기야 노 대통령은 “삼성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 정권과 이 회장의 처음 서먹서먹했던 분위기가 핑크빛을 예고하는 듯 싶었으나, 결국에는 냉랭하게 변해버린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건희 회장의 관계가 ‘일희일비’ 했다면, 노 대통령과 구본무 LG그룹 회장과의 관계는 시종일관 평행선을 걸었다. 사실 노 대통령의 인수위 초기 시절부터 시작, 구본무 회장과의 관계가 외부에 자주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 대통령의 외아들인 건호씨가 LG전자에 근무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업계에서는 “정부와 LG간에 끈으로 작용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오갔을 정도였다. LG그룹은 이런 세간의 시선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세인들은 이후에도 LG그룹에 대해 이런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구본무 회장의 공식적인 만남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였다. 지난 2004년 6월.당시 4대그룹의 회장들은 모두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구본무 회장은 말을 아꼈다. “오늘은 하고싶은 얘기보다 듣고싶은 얘기가 훨씬 많다.”간결하고도 많은 의미를 내포한 얘기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단독으로 재벌그룹 총수를 만난 것은 구본무 회장이 처음이었다.

재계에서는 노 대통령이 명실공히 서열 1위인 삼성그룹이 아닌, 2위 그룹의 회장을 처음 독대한 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심지어는 구 회장이 정부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허황된 추측마저 오갈 정도였다. 같은 해 10월.구본무 회장은 LG전자의 인도현지공장으로 노 대통령을 초대했고, 그는 흔쾌히 동의했다. 노 대통령은 구 회장과 김쌍수 LG전자 부회장 등의 영접을 받았는데 이 자리에서 적잖이 흥분했다는 후문. “인도를 방문하다가 국내 기업의 홍보판을 보면 가슴이 찡했다. 기업이 곧 나라다.”노 대통령이 출장에서 돌아와 내뱉은 말이었다. 지난 4월초.노 대통령 부부와 구 회장 부부의 만남도 이뤄졌다. 이들 네 사람은 만찬을 겸해 무려 2시간 넘게 청와대 관저에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들이 정확히 어떤 얘기들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당시 LG관계자는 “다만 재계의 전반적인 움직임, 경제살리기 방안 등에 대한 논의가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외아들 건호씨가 지난 3월 LG전자 대리로 승진해 이에 관한 얘기도 오갔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날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던 것으로 전해졌는데, 노무현 정부와 구 회장의 관계도 그러했다. 딱히 모날 것이 없는 둥글둥글한 관계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관계는 굳이 따지자면 이들의 중간 선이다. 그동안 눈에 띄는 총애도 없었고, 그렇다고 딱히 트집이 잡힐만한 일도 없었다. 노 대통령과 정 회장의 만남이 이뤄진 것은 지난 2003년이다.지난 2003년 11월.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제주시 주최로 열린 ‘제주 평화포럼’이라는 회의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과 ‘특별면담’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통상적인 대화 이외에 별다른 얘기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노 대통령과 정 회장은 공식적인 전경련 회장단 모임에서 만났지만, 주목할만한 얘기는 없었다.

이건희 회장이나 구본무 회장에 비해 정 회장의 ‘만남’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노무현 대통령과 ‘뜻깊은 만남’을 가진 것은 올 초였다. 지난 3월11일.정몽구 회장은 당시 회사에서 개발한 수소전지 자동차인 ‘투싼’을 청와대 경내로 끌고 들어가, 노 대통령과 한 차에 타고 시승을 하기도 했다. 이후 노 대통령과 정 회장은 친밀한 사이가 유지되는 듯 싶었다. 정 회장이 두 달 뒤, 중소기업에 향후 5년 동안 총 13조원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은 노무현 정부가 정권초기부터 얘기한 기본 정책 중 하나다. 현재로서보면, 노무현 정부와 삼성의 관계는 다시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반면 노 정부와 LG는 집권초기처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현대차그룹은 정권과의 코드 맞추기에 앞장서 관계 개선을 기대하는 분위기.우여곡절이 가장 많은 정권과 삼성의 관계가 어떻게 변모될지가 주목된다.

# 노무현 대통령의 재벌그룹에 대한 발언 일지

삼성그룹
2002년 대통령직 인수위 시절, 반감 역력.
2003년 “노사문제의 해법은 대화와 법”
2004년 9월 이 회장과 동반 러시아 출장
2005년 5월 권양숙 여사와 함께 이건희 회장 부부 독대
2005년 7월 “이미 원천은 재계에 넘어갔다” 화합 무드 역력
2005년 9월 “삼성의 태도에 문제있다” 정면공격

LG그룹
2004년 6월 전경련 회장단 모임
2004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구본무 회장 독대, 인도현지공장에서
2005년 4월 구 회장 부부 청와대 초대현대차그룹
2003년 11월 제주평화포럼에서 노 대통령-정 회장 특별만남
2005년 3월 정 회장 신형차 청와대로 몰고 가 시승
2005년 5월 중소기업에 향후 5년간 13조원 지원키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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