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家)의 형제들을 보면 유독 비운의 황태자들이 적지 않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아래로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장남 이맹희 제일제당(현 CJ)그룹 회장, 차남 이창희 새한그룹 회장, 삼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차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을 두었다. 이 가운데 맹희, 창희씨가 그룹 후계자 자리를 셋째인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주고 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장남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 차남 조동만 전 한솔아이글로브회장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후계구도에서 멀어졌다. 막내인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이 그룹을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승승장구하는 것과 달리 무대 뒤로 사라진 두 형들은 조용하기만 하다. 창립 40주년을 맞아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린 한솔가(家)의 3형제들을 조명해봤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에선 이인희 고문과 조동길 회장 등 한솔그룹 임직원과 황영기 우리금융그룹 회장,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 등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열렸다. 한솔창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오는 2010년까지 ‘그룹 매출 8조원과 현금흐름 수익률 10% 이상 달성’이라는 그룹의 중장기 비전을 발표하는 의미심장한 자리였다. 하지만 단상에 선 이인희 고문과 조동길 회장의 얼굴엔 ‘만감(萬感)’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동석했던 첫째인 조동혁 명예회장도 시종일관 웃는 모습을 보였지만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자식사랑이 남다르기로 유명한 이 고문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은 듯 했다. 이 자리에 둘째인 조동만 전 한솔아이글로브회장이 참석하지 못했다. 현재 조동만 회장은 한솔과 관련한 모든 인연을 끊은 상태다. 이동통신 사업과 관련한 비리 혐의에 대해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으면서 일체의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한솔그룹은 지난 1965년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새한제지를 인수하면서 세운 전주제지(현 한솔제지)를 모태로 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독립한 이후 정보통신·금융·서비스 등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조동만 회장이 한솔PCS 등을 세우며 정보통신 사업을 벌이던 90년대 중반에는 활발한 인수·합병(M&A)으로 계열사 19개에 재계순위 20위권에 들기도 했었다.하지만 돌연 2002년 한솔그룹의 경영권이 3남인 현 조동길 회장으로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재계 일각에선 한솔그룹의 경영권이 장남으로 이어지지 않고 3남으로 넘어간 배경에 여러 뒷말을 제기했지만, 한솔그룹측은 이인희 고문의 지시일 뿐이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한솔의 경영권이 막내로 넘어가기 1년 전에 첫째인 조동혁 명예회장은 그룹 명예회장으로 일선서 후퇴하고 벤처기업 투자자로 급선회하게 된다. 그는 한솔종금(당시 대아금고)과 한솔창투(동서창투) 등을 인수하며 한솔의 금융업 확대를 진두지휘했다.

이때부터 한솔그룹의 경영에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하지만 투자한 대부분의 벤처들이 이렇다할 실적을 보이지는 못했다. 현재 조동혁 명예회장은 자신이 만든 사교모임인 EO(Young Entrepreneurs Organization)에 얼굴을 가끔 비추는 것과 매년 다보스포럼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공식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도 한솔케미칼의 최대주주로 경영권 행사를 하고 있어 한솔과의 인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둘째인 조동만 회장은 2001년 한솔아이글로브, 한솔텔레콤 등 4개의 회사로 구성된 정보통신(IT) 소그룹으로 계열분리하여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조동만 회장 역시 정치권 로비의혹, 배임혐의 등 여러 구설수에 휘말리게 됐고 급기야 법원으로부터 유죄를 선고받아 구속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자신이 계열분리했던 기업들이 산산조각이 나 매각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결국 오직 한솔그룹에 남아 경영승계를 받았던 조동길 회장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동길 회장의 한솔그룹은 계열사를 8개로 줄이는 구조조정 끝에 올해는 전 계열사 흑자를 전망하고 있다. 한솔캐피탈·한솔저축은행·한솔텔레콤 등 부실계열사를 매각하고, 한솔제지·한솔홈데코·한솔LCD 등의 계열사가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 때 장남 조동혁 현 한솔그룹명예회장이 금융부문, 차남 조동만 회장이 IT, 3남 조동길 회장이 제지 부문을 이끌었으나 이제 제지를 모태로 한 조동길 회장의 사업만 남게 된 셈이다.

# 이인희 고문의 수렴첨정 끝나나?
여전히 한솔제지 지배주주로 경영권 포기 ‘안 해’

창립 40주년을 맞아 조동길 회장 체제가 굳어진 한솔그룹. 그러나 지주회사격인 한솔제지의 대주주이자 지배주주는 여전히 이인희 고문이어서 눈길을 모으고 있다. 아들인 조 회장이 경영을 잘 수행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이 고문의 입김이 강하다는 반증이다. 실제로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 고문은 창립 40주년 행사가 있기 전까지도 그룹 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맡아 ‘한솔재도약’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그룹 내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이 고문이 주목받는 것은 아들 3형제 가운데 막내인 조동길 회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 이는 과거 이병철 회장이 경영수완이 탁월하다고 느끼고 3남인 이건희 회장을 후계자로 점찍은 것과 견줄만하다. 능력위주로 후계자를 ‘간택’하는 삼성가의 전통을 그대로 따른 것.

이 고문은 한솔이 삼성에서 분리된 후 동혁, 동만, 동길 3형제와 한 지붕 아래 같이 살면서 엄격하게 경영수업을 시켰다. 3형제는 회사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어머니 대신 ‘고문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였다. 그만큼 어머니를 ‘경영스승’으로 깍듯하게 대했다는 소리다. 심지어 며느리들도 한때 어머님 대신 고문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재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일화다.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이 고문을 가리켜 “자(이 고문)가 남자였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 텐데”라고 말할 정도로 이 고문은 경영자로서의 자질 또한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재계에선 표면적으로 조동길 회장체제가 확고하게 구축되어있기는 하지만 당분간 이 고문의 영향력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