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였다. 그랬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 이건 불문율(不文律)이다. 가령 콩 심으면 콩 나는 것처럼. 해마다 2월이면 허전했다. 아니 허기(虛氣)졌다. 고작 이삼일이 빠졌을 뿐인데 달은 좀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습관인양 허둥댔는지 모른다. 말일(末日)이었다. 얼떨결에 공무를 마감쳤다. 역삼역에서 강남역으로 이동했다. 3000번 좌석버스를 탔다. 고향인 수원행이다. 7시가 모임이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82번 버스는 남문을 지나서 조흥은행과 뉴코아 중간쯤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다. 왼쪽 차창 너머로 어둠 속에 해가 비추듯 간판이 보였다. B치과. 중학교 동창인 친구의 이름을 딴.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었다. 손가락 셈해보니 B와 얼굴본지도 어언 10년이다.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집 장사는 ‘필패’

가슴 속에 사막을 심으면 잔뜩 먼지만 나온다. 추(醜)하다. 반면에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그런 가슴을 지니고 산다면 자신은 물론 행복으로 충만하고, 남에겐 멋지면서 또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이건 참 아름답다. 퍼시 애들론(percy adlon) 감독이 만든 영화 <바그다드 카페>는 그걸 메타포(metaphor)로 마치 정교하게 무늬를 짜듯 사막과 바람, 하늘, 카페 그리고 두 여자주인공과 주변사람들 모두를 아주 기막히게 감독만의 독특한 채색으로 그린다. 동시에 애잔한 음악(Calling you)과 스토리로 마르고 조각난 관객의 마음을 햇살 따스하게 깁는다. 참 아름다운 영화다! 11시 40분. 막차는 오질 않았다.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택시를 타야하나. 아니면 버스가 오길 조금만 더 기다려야 하나.’ 결론은 택시를 타자는 쪽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택시에서 누군가 내린다. 악! 저건 친구 B가 아닌가. 이런 걸 ‘인생사는 유행가와 같다’고 말했던가. 노사연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나도 모르게 바랐기 때문일까. 퍼뜩 그런 생각이 찬바람과 함께 목덜미를 스쳤다. 찌릿찌릿한 묘한 기분이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황금빛 사막이 보인다. 중년의 남자가 서서 오줌을 눈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지만 발길질하는 장면이 흐르고 자동차가 휑하니 한대 서있다. 밑에서 위로 검정색 모자가 벌떡 일어선다. 여자다. 그런데 뚱뚱하다. 여주인공의 하나인 야스민(Jasmin 마리안느 제게브레이트)이다. 그들은 부부였다. 하지만 이내 갈라진다. 남자는 사막에 여자를 혼자 두고서 떠나고 여자는 짐가방을 끌면서 먼지가 폴폴 나는 길 위로 나선다. 송글송글 땀방울이 여자의 둥근 얼굴에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만남은 바람의 결과다. 바라지 않는다면 피하는 건 당연한 몫이다.

땀과 눈물 경험해야

그래서 야스민은 저만치 오는 자동차를 피해 숨었던 것이리라. 주유소가 보인다. 방금, 바그다드 카페의 부부도 싸웠다. 깡통을 줍는 흑인 여자주인공의 이름은 브렌다(Brenda CCH 파운더)로 실질적인 카페의 주인이다. 여기서 깡통은 텅 비었다. 그건 부부의 애정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이콘. 묘하다. 남자는 깡통을 버리되 결코 줍지 않는다. 대신에 여자들은 줍는다. 이런 설정은 남녀의 차이를 심리적으로 상징한다. 야스민도 브렌다도 똑같이 바랐다. 그런데 선택은 달랐다. 야스민은 땀흘림을 선택했지만 브렌다는 눈물을 선택했다. 눈앞의 남편이 없어지길 바라는 순간 두 여자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이 장면에서 많은 걸 생각했다.

1988년에 제작된 영화라지만 새삼 지금에 보더라도 울림이 아주 크다는 건 쉬운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정장진 교수는 “겉보기와는 달리 많은 해석이 따르는 영화”라서 그렇단다. 이에 동감한다. 친구 B는 다른 친구 J에게 전화했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했던가. J를 기다리기로 약속한 장소는 호프집이었다. 너 C 알지? 응. 아직도 군인인가? 그래! 근데 걔 중령이야. 그렇구나! 너 C가 바그다드에도 갔다 온건 아냐? 아니, 난 몰랐어! (…) 참고로 얘기하자면 J와 난 자주 만나는 사이다. B와 J도 뻔질나게 만나는 친구다.

그럼에도 난 B와 10년 만에 만났던 것이다. 만약 간판을 보지 않았다면 오늘 B를 그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그다드 카페>란 영화는 또 어떻고. 치과의사 B는 환자의 치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직업, 경제력 수준 등) 과거가 보인다고 말했다. 정말 한 분야에 10년 종사하면 도통(道通)하나 보다. 아마도 그는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본다면 배우들의 치아만 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업은 못 속인다고 했나보다. 어디 직업뿐인가. 취미도 못 속인다. J에게 <바그다드 카페>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더니 “아, 그거! 제벳타 스틸의 콜링유”하는 게 아니던가. 30년을 줄곧 옆에서 지켜본 친구인지라 그의 음악 수준은 익히 알았지만 놀랄 수밖에. 세상엔 고수가 정말 적지 않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난, 딱 그 짝이다. 영화를 보더라도 관심은 온통 장사로만 기울기 때문이다.

상대 존중은 필수

동업은 깨진다. 잘난 것만 있고 못난 게 없어서다. 반면에 화업은 깨지지 않는다. 화는 상대방의 잘난 점을 칭찬하며 인정한다. 또 모자람을 비난하듯 탓하지만은 않는다. 한국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묻는 인민군 장교의 질문에 촌장은 이렇게 답했다. “뭘 좀 많이 먹여야 되는데.” 정말! 명대사다. 한자 화(和)를 직설적으로 쉽게 풀어놓은 말이 아니던가. 야스민과 브렌다는 서로의 모자람을 인정한다. 이 장면은 모텔 1호실이다. 그 방엔 브렌다의 아들인 살라모가 엄마 몰래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으며 살라모 대신에 야스민은 살라모의 아들을 돌봐주고 있었다. 브렌다의 딸 필리스도 다정한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카페에서 막 나온 브렌다는 씩씩대며 단숨에 1호실 방으로 향하고 마침내 둘은 대판 싸운다. 물론 브렌다의 일방적인 공격이었지만. 그녀의 공격은 이제껏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보안관에게 신고하고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그렇고 사무실 청소했다고 혼쭐내질 않나. 아무튼 잽 끝에 KO펀치 나간다고. 활화산처럼 폭발했던 것이다. 그러니 좀처럼 울지 않았던 야스민도 브렌다가 소파에 앉아서 울었던 것처럼 눈물을 그렁그렁 흘릴 수밖에. 그게 맘에 걸렸던 것이다. 브렌다가 다시 방문을 연다. 그리고 왜 그랬던 것인지? 이유를 또박또박 묻는다. 그랬더니 야스민은 “아이가 없어요”라고 힘없이 처량하게 대답하는 장면. 내 보기엔 압권이다. 거기서 화(和)의 분위기는 무럭무럭 생겨났다. 빈 깡통. 그건 텅 빈 여자의 가슴이었다.

그걸 채우려면 눈물을 쏟아내야 한다. 그래야 그걸 먹고 새싹처럼 마음이 자라나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을 터놓은 두 여자는 서로에게 친구가 된다. 마음을 툭 터놓을 수 없다면 아는 사이일 뿐 좋은 친구는 아닐 것이다. 브렌다에게 있어서 야스민은 좋은 친구다. 오죽하면 버스 모양의 집에서 홀로 기거하는 화가 콕스의 청혼에 브렌다에게 물어본다고 답했을까. 남편과 헤어진 그때는 처지가 비슷(同)했건만 오히려 둘의 관계는 깨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서로의 텅 빈 가슴을 발견하는 순간엔 상대방의 아픔을 눈물이지만 같이 나눠먹었던(和) 것이다. 가슴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 사막만 남길 수도 있고 오아시스로 바꿀 수도 있는 게 우리네 인생사다. 사막엔 모래와 바람만 있을 뿐 사람은 생존하기가 버겁다. 장사도 마찬가지다.

주인이나 종업원의 가슴이 따뜻해야 가게가 장사가 잘 되는 오아시스로 변하지, 황량하고 공허하면 장사가 잘 될 턱이 없다. 퍼시 애들론은 그걸 ‘카페’로 대신 강조했던 것이다. 영화에서 야스민은 아마추어 마술사로 나온다. 고객이 왜 과자가 없냐고 묻자 마술로 과자를 손에서 빼내며 즐겁게 만든다. 꽃마술, 동전마술, 달걀마술 등. 차츰 입소문이 사막의 길을 횡단하는 트럭 기사들 사이에서 무전기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매장은 활기를 더해간다.

고객이 즐거워야 매장도 활기

바글바글, 북적대는 카페를 바라보는 브렌다의 웃음은 쓰지 않고 달다. 자기 고집대로 장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객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종업원에게 아니면 외부인에게 물어서라도 배워야 할 것은 배워야 한다. 프랜차이즈 본부는 가맹점의 매출활성화 전략을 위해서 마술동호회와 전략적인 제휴를 맺을 필요가 있다. 독립점포는 종업원 채용에 있어서 삼고초려하는 마음으로 우수한 인재를 찾아나서야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쇼엔 진정한 매력이 발휘될 수 없다. 바그다드 카페에 어울리는 바그다드만의 쇼를 개발할 때 고객은 열광한다. 믿어도 좋다.


# 신바람 경영…성공의 ‘지름길’

야스민은 보통의 여자다. 또 브렌다도 평범하다. 고객과 주인의 관계를 눈물로 허물고 진정한 친구가 되면서 개인으론 어쩔 수 없어 방치했던 일상은 변화한다. 영화는 ‘마술’로 포장했지만 관객은 그게 ‘사랑’이란 걸 금세 알 수 있다. 하긴 ‘매직’은 ‘사랑’이다. 고객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고객은 ‘친구’가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헬로 매직’이란 노래는 ‘장사란 즐겁게 노래를 부르듯이 신나게 흥에 겨워야 한다’는 경영철학으로 이해해도 좋을 만큼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고객이 매출을 장악한다.

‘친구’로 받아들이면 최소한 평균매출이 된다. 또 고객의 체험이 친구에서 ‘신자’로 바뀌게 되면 최고의 매출이 갱신된다. 이게 불변하는 장사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자. 카페엔 커피가 없다. 머신이 고장났기 때문이다. 이 장면도 기억에 새록새록 여운으로 남는다. 명장면으로 잊히지 않는다. 왜냐면 청소라곤 도무지 할 것 같지 않은 지저분한 카페에서 단순히 커피가 없다고 장사가 안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브렌다의 남편은 무서운 마누라 등살에 야스민의 남편이 길에다 버린 커피보온병을 도로 줍지만 말이다. 커피집이든 맥주집이든 단순히 제품만 팔아서는 매출을 활성화할 수 없다. 무엇보다 고객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끔은 ‘대청소(영화에선 야스민이 청소를 했지만)’도 하고 종전과는 다른 업서비스(up-service)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바그다드 카페>에선 “제품보다 경영이 중요하다”로 강조했던 것은 아닐는지. ‘스타벅스의 성공비결’이 무엇인지 안다면 문제의 해답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으리라. 이제 <바그다드 카페>는 더 이상 카페가 아니다. 스타벅스가 커피집이 아니고 ‘사무실임대업’이라고 보는 시각처럼. 요즘 잘 나간다는 창업시장의 프랜차이즈도 눈치를 알아챘나 보다. 친구인 고객이 편안한 장소로 느낄 수 있도록 ‘사랑방’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취하는 건 바다’, ‘쪼끼쪼끼’, ‘와바’가 국내에선 이름값이 통하는 또 하나의 봐줄만한 이유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맥주만 팔지 말고 매직도 팔면 안 되겠니?”라고 말한 개그맨의 인기 버전도 있지만 “세상에 안 되는 게 어딨니?”하는 것은 바로 고객의 목소리임을 간과하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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