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2년 전 조선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자신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글을 세상에 펴냈다. 한글은 그 어떤 소리도 글자로 표시할 수 있는 데다 반나절이면 쉽게 터득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런 한글이 세월이 갈수록 고생하고 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우리가 고생시키고 있다.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간판을 보라. 우리말로도 얼마든지 표기할 수 있는데도 영어 일색이다. 신문을 보라. 한글을 읽는 건지 영어를 읽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특히 경제면은 가관이다. 한 문장에 한글보다 영어가 더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 한글을 조사로만 사용하는 문장도 수두룩하다. 

TV와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라. 한국방송인지 영어방송인지 모를 정도로 영어가 범람하고 있다. 여기가 한국인지 영어권 국가인지 헷갈릴 정도다.

좋다. 영어가 세계 공용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제대로 써야 할 게 아닌가. 국적 불문의 ‘콩글리시’는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잘못 쓰고 있다면 고쳐야 하는데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틀린 채 그대로 사용한다. 강심장도 이런 강심장이 없다.

“우리끼리만 통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강변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렇다면 한글날은 뭐하러 있는가. 한글날을 공휴일로 제정한 것은 우리말을 사랑하자는 취지와 함께 한글뿐 아니라 외래어, 외국어를 제대로 쓸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도대체 ‘아이돌 그룹’이라는 게 뭔가. 인기 있는 가수들을 칭하는 것 같은데, 영어권 국가에 가서 ‘아이돌 그룹’이라고 말해 보라, 통하는지. ‘아이돌 스타’는 또 무슨 말인가. 단어 조합도 참 잘한다.

한때 휴대전화기 또는 휴대폰을 ‘핸드폰’이라고 해서 고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는데, 최근에는 ‘손전화’라는 단어가 느닷없이 등장해 어리둥절하다. 그것도 언론사들이 사용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물론 우리 국어사전에 ‘손전화’를 ‘토박이말로 만든 새말’이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실상 ‘손전화’는 북한에서 쓰는 표현이다. 우리는 그동안 ‘휴대폰’ 또는 ‘휴대전화기’로 써오지 않았던가.

‘손전화’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핸드폰’을 순우리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핸드폰’이 영어인가. 영어권 국가에서 ‘핸드폰’이라고 말해 보라,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북한식 표현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요즘 남북 화해 분위기에 편승해 북한식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언론사들이 적지 않아 우려스럽다.

얼마 전 끝난 아시아 경기대회를 전후해 남북공동 입장과 남북 단일팀 등을 포함해서 쓰는 ‘공동 진출’이라는 북한식 표현을 우리 언론사들은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했다. ‘4·27 판문점 선언문’의 영향 때문으로 보이긴 하지만,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어를 섞어 쓰면 ‘있어’ 보이는가, 유식해 보이는가. 북한식 표현을 쓰면 참신해 보이는가. 우리말이 엄연히 있는데도 굳이 영어나 북한식 표현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신없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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