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5일 1심 선고→보석 신청 ‘기각’→잇따른 항소심

 

남재준 전 국정원장 [뉴시스]
남재준 전 국정원장 [뉴시스]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6억, 8억, 21억. 이 '억'소리 나는 금액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당시 근무하던 남재준·이병기·이병우 전 국정원장들이 각각 청와대에 예산 지원 명목으로 건넨 특수활동비 내역이다.

최순실 씨가 연루된 일명 '국정 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이 사건도 수면에 드러났다. 이를 두고 단순한 '예산 지원'인지 '뇌물'인지를 가리는 첨예한 법적 공방이 진행 중이다.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 "박 전 대통령, 특활비 잘못된 것 알면 안 받았을 것"

-이병호 전 국정원장 "대통령, 안보 공동체 관계청와대 예산 지원 안보활동 일환"

 

이병호 전 국정원장 [뉴시스]
이병호 전 국정원장 [뉴시스]

서울고등법원(이하 서울고법) 502호에서 특정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국고 등 손실)의 혐의를 지닌 남재준(73)·이병기(71)·이병호(78) 전 국정원장 외 2명을 상대로 한 항소심 5차 공판이 지난 4일 형사3부(부장판사 조영철)의 심리로 개최됐다.


이들은 박근혜(66) 전 대통령 시절 국가정보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이하 국정원 특활비)를 청와대에 상납하거나 관여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다. 


이날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 뇌물 혐의에 대한 증인 자격으로 참석한 사람은 이 사건의 피고인이기도 한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다.


해당 재판에서 증인 신문을 진행한 검사는 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 “청와대에 전달한 1억5000만 원은 국정원 직무 범위 내인 특수 공작 사업에 사용된 게 아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국정원은 국가 안전 보장을 지켜나가는 업무를 수행하며 다른 안보부처와 끊임없이 연계한다”면서 국정원법 3조(국정원은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자재·시설 및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 등의 직무를 수행한다)를 내세우기도 했다. 


그는 이 논지를 바탕으로 “대통령과도 안보 공동체 관계”라면서 “국정원에서 대통령 지시에 의해 청와대에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안보활동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마라톤’ 항소심 공판

 

이보다 앞선 지난 2일 오전 10시 서울고법 312호에서는 동일한 재판부의 심리로 전 국정원장 3명 외 2명에 대한 항소심 4차 공판이 열렸다.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큰 사건의 부분인 만큼 오늘 항소심 또한 묵직한 공기가 감돌았다.


먼저 재판이 이뤄진 장소 또한 기자가 방청했던 이전 재판들과는 달랐다. 전에 비해 확실히 넓은 규모의 재판장으로, 우리가 드라마 등을 통해 쉽게 보고 상상해 온 장소와 흡사했다.


이날 재판 역시 증인 신문이 주를 이뤘다. 이날 증인석에는 일명 ‘문고리 3인방’ 중의 한 명인 안봉근 전 청와대 비서관이 나왔다.


검사의 주신문으로 시작돼 변호인단의 반대신문로 이어졌는데, 증인 한 사람에 대한 신문 시간만 2시간을 넘는 등 여타의 재판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해당 재판을 방청하던 관계자 역시 “(증인 신문이) 오전 중에 끝난다고 들었는데 (어려울 것 같다). 지금(시간)까지 (증인 신문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상당히 긴 편”이라고 말했다.


세 명의 전 국정원장은 2013년 5월부터 2016년 9월까지 매달 5000만 원에서 1억 원 상당의 원장 특활비를 청와대에 건네는 방식으로 총 36억5000만 원에 이르는 액수를 전달했다.


해당 금액의 운반책을 맡았던 증인을 상대로 가장 핵심적으로 다뤄진 것은 ‘돈의 성격 인지 유무’였다.


검사와 변호인 측 모두 증인이 이헌수 전 국정원 기조실장으로부터 건네받아 청와대에 전달한 돈의 성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했다. 특활비의 ‘뇌물성’을 따지는 것이 주요 쟁점이었던 셈.


이 사안이 중핵적으로 다뤄지는 이유는 만약 전달된 국정원 특활비가 갖는 의미가 단순한 예산 지원 등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을 경우, 이를 ‘상납’으로 받아들이고 건넸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증인은 “(이 전 기조실장에게) 받아서 전달한 것뿐”이라며 “(돈을 운반한) 길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이용한 것이지, 은밀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증인이 이 전 국정원 기조실장에게 “V(박 전 대통령)가 어렵다”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도 사실 관계 확인이 진행됐다. 청와대가 국정원을 상대로 압력을 가한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증인은 해당 발언을 한 것은 시인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이) 심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였지, 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단언했다.

이병기 전 국정원장 [뉴시스]
이병기 전 국정원장 [뉴시스]

“박 전 대통령 돈 욕심 없어”

 

박 전 대통령은 국정원 특활비를 최순실(62) 씨 등과 통화하는 차명 휴대전화 요금과 기 치료 및 주사 비용, 삼성동 사저 관리비 등으로 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목에 대한 신문도 이뤄졌다. 국정원 특활비를 박 전 대통령이 사적 용도로 사용했는지, 아니면 국가 예산으로 운용했는지를 파악하고자 한 것.


증인이 박 전 대통령을 오랫동안 보좌했다는 점에 기대어 박 전 대통령의 ‘스타일’을 묻는 경우도 있었다.


한 변호인은 “증인이 (박 전 대통령 관련 증언을 하면서) ‘스타일상’ 등의 발언을 많이 하는데, 박 전 대통령의 돈에 대한 스타일이나 철학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이에 증인은 “(박 전 대통령은) 돈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이 밖에도 “‘상납’이라는 표현에 동의하느냐” “(박 전 대통령이) 공금을 사적으로 쓰느냐” “(박 전 대통령은) 공금과 개인 돈을 엄격히 구분한다는데. (증인이 옆에서 봐 왔을 때) 어떤가” 등 직설적인 질문들이 던져졌다. 


증인은 “(박 전 대통령은 국정원 특활비 받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면 안 할 것”이라고 증언했다.


한편 지난달 20일 서울고법 형사3부는 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과 이 전 국정원 기조실장의 보석(보증금 등 특정 조건을 내건 석방) 요청을 모두 기각했다.


이병기 전 국정원장은 같은 달 11일, 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지난 8월 3일, 이 전 실장은 8월 25일 보석을 신청한 바 있다.


앞선 지난 6월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성창호 부장판사)는 남 전 국정원장에게 징역 3년, 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는 각각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들은 국정원장으로 있으면서 박 전 대통령에게 각각 6억 원, 8억 원, 21억 원을 지원했다.


당시 재판부는 특활비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점이 인정된다고 여기고 국고 손실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 판단했다. 다만 “직무 관련 대가라는 점이 입증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예산 지원으로 인식하고 줬을 가능성이 높다”며 뇌물로 건넨 혐의는 무죄로 봤다.


이와 더불어 이 전 국정원 기조실장에게는 징역 3년이, 국정원에서 1억 5000만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과 이 전 국정원 기조실장은 실형 선고 뒤 법정에서 구속 조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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