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철학자 레이몽 아롱은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다. 미래와 과거의 투쟁은 더더욱 아니다.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와 이념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라고 갈파했는데, 지금 우리 정치는 그 정반대로 가고 있다.

10·4 남북공동선언 11주년을 기념해 지난 4~6일 방북했던 민주당 이해찬 대표의 부적절한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이 대표는 4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통일 위업 성취에 남녘 동포도 힘을 합쳐 보수 타파 운동에…”라는 연설에 화답이라도 한 듯, 5일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정권을 뺏기면 (교류를) 못하게 되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했다. 이어 기자들에게 “평화체제가 되려면 국가보안법 등을 어떻게 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남한에서 보수세력이 집권하면 남북교류도, 통일도 더 멀어진다는 듯한 발언은 조공(朝貢)외교로 비춰질 수 있으며, 공산주의 적화통일을 명시하고 있는 조선노동당규약 수정 요구 없이 먼저 보안법 문제를 꺼낸 것은 패배주의 발상이다.

이해찬 대표의 발언은 매우 부적절했다. 여권이 남북관계를 국내정치에 이용하려 한다는 우(愚)를 범했고, 오만함의 극치로 절제력을 잃었으며, 사실관계를 왜곡·호도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하다.

건국 이후 보수 세력은 남북 관계 발전을 반대한 적이 없다. 박정희 정부는 ‘선 건설-후 통일’, ‘선 평화-후 통일’ 방안의 연장선상에서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부의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은 노태우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비핵화공동선언 채택으로 계승되었다.

김영삼 정부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채택하여 김일성과 남북 정상회담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 이명박 정부는 통일의 날을 대비해 통일세를 포함한 통일비용의 마련 방안을 제안했으며, 박근혜 정부는 ‘통일 대박’을 상기시켜 정권 차원에서 통일 비용 및 효과에 대한 연구가 진전됐다.

누가 ‘통일의 적(敵)’이란 말인가. 북한에 대한 인식, 북핵폐기 방법, 통일 방안 등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을 보이는 정당, 사회단체는 있지만, 통일을 반대하는 세력은 없다. 통일의 적은 보수 세력이 아니다. 북한 민중을 굶기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1·2차 연평해전 등을 도발한 북한 정권과 북의 세습 독재를 비판 없이 추종하고 북의 인권탄압에는 눈감는 국내의 종북세력이 통일의 적임을 잊어선 안 된다.

통일 이슈는 좌파 우파를 떠나 특정 정당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좌파가 ‘진보’의 이름을 독점하고 국민에게 거짓 선전·선동을 일삼는 정치 현실이 개탄스럽다. 초당적인 협력으로 통일문제를 풀어야 할 현 정권은 김정은을 친구로 삼으면서 국내의 정통 보수세력을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책에서 “정치인의 무지와 국민의 나약함이 파국(전쟁)을 불렀다”고 강조했으며, “독일이 국제연맹을 탈퇴했는데도 영국 노동당과 자유당은 ‘평화’를 들먹이며 군비 축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전쟁광과 유언비어 유포자로 몰아세웠다.... 국민들 역시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에 안주했다”며 통탄했다.

이 내용을 우리 현실에 대입해보면 어떻게 될까. “북한이 NPT를 탈퇴하고 핵 폐기(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는데도 한국의 좌파 정당은 ‘평화’를 들먹이며 ‘선(先) 핵폐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전쟁광과 통일의 적으로 몰아세웠다.” 우리는 ‘표’를 위해서라면 국가 존망의 문제마저 외면하는 정치꾼들의 존재를 개탄한 처칠에게서 배워야 한다.

좌파의 ‘반(反)통일’ 낙인찍기가 두려워 바른 통일방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 ‘맹목적 평화주의’는 전쟁을 불러들여 파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이 땅의 우파 야당은 한미동맹을 균열시켜 ‘전쟁을 불러들이는 세력’과 ‘진정한 평화세력’이 누구인지를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선(先) 비핵화-후(後) 제재완화’의 대원칙에 입각한 ‘북핵폐기결의안’을 국회에서 발의할 것을 제안한다.

집권 여당은 퇴행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적폐청산 도그마에서 벗어나 “백성에 도움 되면 오랑캐에도 배워야 한다”는 연암 박지원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명상록》에서 갈파한 “최선의 복수는 적들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라는 것을 실천할 때 정권의 성공과 재집권의 길도 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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