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남북 화해무드에 편승하여 한동안 잠잠했던 국가보안법의 존폐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평양에서 “평화체제가 되려면 국가보안법 등을 어떻게 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 보수 정당이 크게 반발하면서다.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대상으로 적용되는 법이기 때문에 남북 화해무드 조성에 걸림돌이 된다는 게 이 대표 발언의 취지로 읽힌다. 물론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조성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분위기만 조성됐을 뿐 현재까지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실행된 사안이 없다. 더욱이 북한은 지금도 조선노동당규약에 공산주의 적화통일을 명시하고 있다. 만약 이 대표가 위와 같이 좋은(?) 취지로 국가보안법 문제를 꺼내야 했다면 노동당규약 수정 요구도 같이 했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다. 이 대표는 7선 의원이자 국무총리까지 지낸 노련한 정치인이다. 보수 야권이 이 같은 논리를 들며 반발할 것을 그 역시 짐작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대표가 무리수를 둔 데는 ‘철저히 계산’된 노림수가 있었을 것이란 관측이다.

- ‘집토끼 다지기’ + ‘숙원사업 해결 첫 삽’... 정치권 일각 “‘文의 입’이었나...”
- 盧 정부 총리 시절 “국보법은 악법”, “보수 원로 시국선언=쿠데타 선봉에 섰던 분들”

10.4 남북공동선언 11주년을 기념해 4~6일 방북했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평양에서 한 발언들이 연일 후폭풍을 불러오고 있다.

이 대표는 5일 안동춘 최고인민회의 부의장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정권을 뺏기면 (교류를) 못하게 되기에 제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안 뺏기게 단단히 마음먹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자들에게 “평화체제가 되려면 국가보안법 등을 어떻게 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해찬, 野 ‘십자포화’에
한발 물러섰지만...

이 대표의 해당 발언에 야당은 “북한에서 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며 강력 반발했다. 한국당 윤영석 수석대변인은 7일 “이 대표에겐 ‘눈엣가시’일지 모르나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며 “(이 대표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바른미래당 노영관 부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이 대표가 평양에서 장기 집권의 야망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국민을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며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줄 뿐이며 대한민국 주인이 국민임을 망각한 것임을 알고 이 대표는 깊이 자성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야당의 십자포화가 이어지자 이 대표도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다. 이 대표는 지난 9일 국회에서 방북 성과를 설명하는 기자간담회를 가지고 “평양에서 (남측) 기자가 방북 소감을 묻기에 ‘대립·대결 구도에서 평화·공존 구도로 넘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그에 맞는 제도와 법률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국가보안법도 그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대표 발언의 골자는 평양에서 자신의 발언이 확대 해석됐을 뿐 정말로 폐지나 개정할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는 7선에 국무총리까지 지낸 상당한 정치 내공의 소유자다.

국가보안법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집권 여당 대표인 자신이 언급했을 때 미치는 정치적 파장을 몰랐을 리 없다. 결코 이 대표가 별 생각 없이 불쑥 내뱉은 것도 아니고 원론적 차원의 단순 발언도 아니라는 해석에 설득력이 실리는 이유다.

이에 정치권은 이 대표가 이 같은 발언을 한 데는 치밀한 계산이 깔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다음 세 가지를 그 배경으로 꼽는다. 먼저 ‘전선 형성’ 의도다. 국내에 미칠 파장을 모르지 않지만 그 보다도 집토끼 잡기에 우선순위를 뒀다는 의미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이 대표는 지지율을 의식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집토끼를 공고히 다져가는 유형이다. 국보법 폐지 및 토지공개념 발언이 전형적인 예”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집권 초기부터 고전했던 이유가 결국은 집토끼의 증발 때문이라는 것을 이 대표는 잘 안다”고 설명했다.

‘숙원 사업’ 해결 위한
‘최적기’로 판단...

다음으로 정치권은 이 대표의 특유의 꼿꼿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리스크가 예상되지만 이번에야 말로 자신의 ‘숙원 사업’이었던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대표는 총리이던 지난 2004년에도 보수 원로들이 발표한 시국선언에 대해 “국가보안법은 법의 형식을 갖고 있을지는 몰라도 얼마나 국민을 괴롭힌 악법이냐”며 “쿠데타 주도 세력이 여러 분 (시국선언 참여 인사 명단에)들어가 있는데 그분들이 이제 와서 자유민주 수호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말했다.

이후에도 국보법 개정과 관련해선 꾸준히 논의가 있었지만 보수 진영의 반발과 민감한 남북 관계의 변화로 인해 번번이 무산됐다. 결국 이 대표는 국보법을 건들기 위해선 지금이 최적기라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가 보수 야당의 반발로 인해 한발 물러났음에도 정의당은 되레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낼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방증하는 대목이다.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는 9일 “정의당은 종전선언과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법안을 제출할 것”이라며 “국가보안법은 오직 사망선고를 기다리는 사문화된 법일 뿐, 더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마치 이 대표가 점화한 ‘국보법 불씨’에 정의당이 군불을 때는 모양새다.

이 대표와 평양에 동행했던 민주당 원혜영 의원 역시 “2004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우리 당이 국가보안법을 실정에 맞게 전면 개정하자고 합의했었다”며 “그런 논의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환경이 됐을 때 (국보법 개정을)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끝으로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결코’ 할 수 없는 발언을 여당 대표인 이 대표가 ‘대신’ 했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는다. 시사평론가 A 씨는 9일 “(발언의) 효과가 있었는지는 북한 당국자들만 알 것이고, 이 대표에게 남한 내 반응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대통령이 절대 할 수 없는 행위를 그가 대신함으로써 ‘대통령-여당 대표 분리’ 이후 최고의 역작”이라고 비꼬았다.

또 다른 전문가 역시 “이 대표의 막말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다”라며 “이 대표의 무책임한 막말은 장기 집권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정부의 정책 수행에도 결코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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