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부인부터 내조형, 운동가까지 천태만상

프렌체스카, 공덕귀, 육영수, 홍 기, 이순자, 김옥숙. 이들은 우리나라의 가장 깊숙한 안방 살림을 책임졌던 대통령 영부인들의 이름이다. 항상 국민들의 관심대상이지만 그만큼 알려져 있는 사실 또한 많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작게는 청와대, 크게는 나라의 가정 살림을 걱정하며 작지만 큰 가정 경제에 대해 노력했다. 하지만 퍼스트레이디들의 경제활동에는 특징이 있다. 조용한 내조형이 있는가하면 활발한 운동가, 재태크, 귀재형 등 다양하다. ‘연희동 빨간 바지 복부인’, ‘매일 가계부 쓰는 영부인’, ‘베개 속 영향력’ 등 이들을 부르는 애칭 또한 다양하다. 어떤 영부인이 어떤 경제개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기자생활을 거쳐 청와대비서관을 역임한 조은희 한양대 겸임교수가 펴낸 ‘한국의 퍼스트레이디’ 통해 ‘장롱 속 경제생활’을 들춰보았다.


명품족, 연희동 빨간 바지 복부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순자 여사를 칭하는 말이다.

한때 재테크의 명수로 알려진 이 여사는 결혼당시엔 살림살이가 거의 없어 이불장 대신 사과 궤짝을 장롱 대신으로 사용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다.

1년간 미용학원에 다니면서 미용사 자격증을 따 직접 미용실 운영을 하기도 했다. 이어 전 전 대통령 몰래 편물기술을 익혀 일을 하기도 했다.


연희동 빨간 바지 복부인

이후 11년 만에 보광동에 집을 마련했으며 1966년 보광동 집을 팔고 신촌전화국 연희 1동으로 이사했다.

또한 1970년 전 전 대통령은 주월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해 월급이 많아져 연희동으로 이사하면서 산 땅에 새 집을 지었다.

또 악착같이 땅과 집을 팔고 사면서 또 새집을 지었다. 훗날 이 여사는 부동산 투기설에 휘말리면서 연희동 빨간 바지 복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후 1979년 보안사령관 부인이 되면서 모 여성지와 인터뷰에서 예쁜 옷에 카르티에 명품시계를 차고 나와 명품족으로 찍혔으며 대통령 취임식장에 화려한 옷을 입고 나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돼 시청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베갯속 영향력

베갯속 영향력은 전 노태우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를 뜻한다. 말처럼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있으며 재임 중 한 건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여사의 작은 목소리는 베갯속 이야기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귀가 큰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김 여사는 신혼시절 청파동 산동네 꼭대기 문간 셋방에 방을 차렸다. 가난한 산동네라 수도 시설이 되지 않아 물을 사먹어야 했으며 가끔 한 봉지씩 생기는 건빵을 모았다가 동네 구멍가게에서 반찬거리와 바꾸는 등 생활비를 최대한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여사는 전임인 이순자 여사의 옷차림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감안한 차별화 전략을 통해 육영수 여사를 벤치마킹해 자연스러운 색들을 조화시켜 한복의 멋을 냈다.

또한 비슷한 옷을 여러 벌 준비해 사치스럽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김 여사는 대단한 멋쟁이임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과 시선 때문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휘해 솔직한 옷 입기를 하지 못했다.

보통사람의 아내로 보이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순자 여사가 분홍빛 철쭉이 그려진 화려한 식기를 선택했다면 김 여사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푸른 봉황 무늬가 그려진 식기와 진초록의 십장생과 황금휘장 무늬 등 귀족풍 식기로 교체했다.

한 발 물러난 현모양처는 김영삼 전 대통령 부인 손명순 여사다. 집에 오는 손님을 절대로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으며 밥 한 끼는 꼭 먹여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측근들이나 기자들은 상도동 집에 가면 언제든 시래깃국에 갈치 한 토막은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상도동 현모양처

퍼스트레이디가 돼서도 환경보호와 건전한 소비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며 식당메뉴를 칼국수, 설렁탕, 비빔밥 등으로 간소화 했으며 식당 운영을 셀프로 바꾸고 ‘식당에 음식을 남기지 맙시다’라는 표어를 붙였다고 한다.

또 일회용품 안 쓰기, 폐품 줄이기, 재생지 쓰기 등등 물자를 낭비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손 여사는 자신이 입은 옷의 라벨을 떼고 입었으며 청와대 면회실로 들어온 선물도 대부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 여사는 이화여대 약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마산 재벌가의 딸이었지만 방광염, 백반증으로 고생하는 등 순탄치 않은 굴곡을 겪기도 했다.

대통령 단임 임기가 시작된 1980년 이후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훌륭한 퍼스트레이디로 꼽히는 업적형은 이희호 여사다.


동교동 활동가

동교동 시절부터 검소한 것으로 유명했던 이 여사는 청와대 안주인이 되어서도 이전과 다름없이 검소하게 살림을 운영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침대를 제외하고 의자, 식기 등 대부분을 전임자가 사용하던 것 그대로 썼다.

또한 1999년 5월 백화점조차 잘 가지 않은 이 여사에게 옷 로비 사건이 터졌을 때 “옷장 문을 열고 모두 확인해봤는데 그 중 크리스찬 디오르의 약자인 CD이니셜로 된 것 딱 한 벌이 있었는데 좋아하지 않은 옷이라 지하에다 걸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 여사는 대한민국의 역대 퍼스트레이디 중 가장 고학력으로 퇴임 후에도 재임 중 만들었던 사랑의 친구들과 한국여성재단의 명예 총재와 명예 고문 등 활발한 활동을 하는 최초의 퍼스트레이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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