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26)
삼 불 망(三不忘) - (26)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8-10-15 14:51
  • 승인 2018.10.15 14:52
  • 호수 1276
  • 6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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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소주에서 오왕 부차와 서시의 발자취를 그리다

다음 날 아침.

이제현 일행은 500년 전 제나라의 흥망을 지켜 본 당추에 제를 올린 후 고을 어귀까지 배웅 나온 촌장 이세웅 이하 촌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배웅객들 중에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해월이의 모습도 보였다.

청주를 떠나 소주로 가는 도중 이제현은 역사를 더듬어 웅대한 고구려사를 반추하다가 영웅 이정기 장군이 환생하여 자신을 감싸고 동행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자 아득한 평원에 한 무리의 철기병 대열이 질풍신뢰(疾風迅雷, 사나운 바람과 빠른 번개) 같이 내달려오는 환청에 사로잡혔다.

맨 앞에서 이정기 장군이 일장검 비켜들고 중원을 호령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제나라 군사들의 일사불란한 진용과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으며, 중원에 피워 오르는 흙먼지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이때 홀연히 이정기 장군이 백마를 타고 이제현 앞에 나타나 “고려 반도에 갇혀 아귀 다툼하지 말고 넓은 대륙을 보아라!”고 벽력같은 일갈을 하였다.

이제현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이 충선왕이 불쑥 말을 꺼냈다.

“이번 여행에 익재가 없었으면 안 될 뻔했네.”

권한공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며 화답했다.

“상왕 전하의 말씀이 지당하시옵니다.”

이제현 일행은 청주를 출발하여 소주(蘇州)에 당도한 후 먼저 고소성(姑蘇城)을 찾았다. 고소성은 고소산에 쌓은 성으로, 태호(太湖)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이 고소성 안에 있는 고소대(姑蘇臺)는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을 쳐서 이겼을 때에 월왕 구천이 서시(西施)를 미인계로 바치자, 그녀를 위해서 지은 누대(樓臺)이다. 이제현은 이 자리에서 <고소대>라는 시를 썼다.

苧羅佳人二八時(저라가인이팔시) 저라산 나무꾼 예쁜 딸은 이팔청춘

玉質不努朱粉施(옥질불노주분시) 옥 같은 살결은 분도 연지도 일없네.

吳宮歌樂幾時畢(오궁가악기시필) 오나라 궁전의 환락은 언제 끝나나?

正是越王嘗膽日(정시월왕상담일) 월나라 임금은 와신상담하고 있는데

姑蘇城外秋草多(고소성외추초다) 고소성 꼭대기는 가을 풀이 가득하고

姑蘇城下江自波(고소성하강자파) 성 아래에는 강물이 철썩이는데

夷舟可今在何(치이주가금재하) 치이 조각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이제현은 서시의 미색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한 오왕 부차를 꼬집고 싶었다. 부차가 고소대에서 서시와 사랑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아 결국 월왕 구천에 패망한 것을 빗대어 노래했다.

저라산은 항주에 있는 서시의 고향이고 나무꾼의 예쁜 딸은 서시를 말한 것이다. 치이 조각배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패망시키고 난 후 월나라 군사 범려가 그의 정인인 서시를 태우고 월나라를 떠나 산동성의 제나라로 떠날 때 쓴 배 이름이다.

이제현은 고소대에서 내려와 서북쪽으로 10리 남짓 떨어진 지점에 있는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한 <호구(虎丘)>에도 들려 시 한편을 남겼다. 호구는 월왕 구천과 싸우다 숨진 오왕 합려(闔閭, 부차의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합려가 죽어 이곳에 무덤이 완성되자, 사흘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그 위에 올라가 왕릉을 지키고 있는 것이 발견돼 호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현은 여기에서 나그네의 쓸쓸한 마음을 그렸다.

합려성 밖에는 역사 오랜 가람(嘉藍, 중이 도를 닦는 집)이 있는데

생공의 강당 앞은 나무 그늘이 침침하다.

두 번 찾아오니 또렷이 삼생(三生, 전생·현생·후생)을 잇는 꿈

네 곳 둘러봐도 아득히 만 리 닫는 마음

누각 그늘 겹치니 산에 달이 오른 것을

녹로(, 도르래)소리 머니 바위샘이 깊은 탓이라.

남여(藍輿, 가마)를 타고 강촌 길 돌아가노라면

구름 끝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항주에서 월왕 구천과 범려의 발자취를 느끼다

이제현 일행은 소주를 다 둘러보고 다시 항주로 향했다.

도중에 충선왕이 이제현에게 말했다.

“강남 사람들은 ‘하늘에는 극락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 상유천당 하유소항)’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무슨 다른 의미가 있는가?”

“소주에는 태호를 비롯한 아름다운 호수들이 있어 마르코폴로(Marco Polo)는 일찍이 소주를 ‘동양의 베니스’라며 그 아름다움을 극찬하였사옵니다. 항주는 비단, 물, 미인으로 유명한데, 둘레가 40리나 되는 서호(西湖)는 만리장성, 계림산수와 함께 ‘중국 3대 명승지’로 꼽힙니다. 수양제(隋煬帝)가 서호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대운하를 건설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수양제가 서시(西施)의 고향을 동경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항주에 도착한 이제현은 월왕 구천을 춘추5패로 만든 범려(范)의 발자취와 체취를 느끼고 싶어 월왕산성을 찾아 <범려>를 읊었다.

論功豈破强吳(논공기시파강오) 공을 논하면 어찌 강국 오를 쳐부순 것뿐이랴

最在扁舟泛五湖(최재편주범오호) 가장 큰 공은 오호에 조각배를 띄운 데 있네.

不解載將西子去(불해재장서자거) 서시를 배에 싣고 떠나지 않았더라면

越宮還有一姑蘇(월궁환유일고소) 월나라 궁전에도 고소대가 또 하나 있었으리라.

이제현은 범려와 서시의 역사적인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다. 그는 범려가 원모심려를 발휘해 서 월왕 구천이 다시 서시의 미모에 빠져 오왕 부차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썼다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해(1319년) 4월 중순. 이제현 일행은 항주를 둘러보고 다시 영파시로 향했다. 해양도시인 영파시에서 하루를 머문 뒤 배를 타고 주산(舟山)의 유명한 어항인 심가문(沈家門)으로 가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보타산(普陀山)으로 향했다.

보타산은 절강성 영파시 동쪽 바다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다. 산들은 높지 않지만 기세가 웅장하고 물은 깊지 않지만 파도소리 요란하며, 나무들이 수림을 이루고 하늘을 떠받고 있는 풍경이 가히 장관이었다.

보제사의 주지스님이 보타산에 대해 충선왕에게 설명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보타산은 지장보살을 모신 구화산(九華山), 보현보살을 모신 아미산(峨眉山), 문수보살을 모신 오대산(五台山)과 더불어 중국 4대 불산 중의 하나로 ‘중국 제1의 불교 왕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제현이 충선왕에게 부연 설명을 했다.

“옛 시인들도 ‘산과 호수의 으뜸은 서호에 있고, 산과 강의 명승은 계림(桂林)에 있고, 산과 바다의 절경은 보타에 있다’고 노래했는데, 막상 보타산에 와보니 옛 시인의 노래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이제현 일행은 관세음보살이 환생했다는 보타산에 한동안 머물며 여행으로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충선왕은 항주에서 유명한 화가 오수산(吳壽山)과 석학 탕병룡(湯炳龍)을 보타산으로 초청했다. 오수산이 충선왕과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렸고, 탕병룡이 그림에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라고 찬기(贊記)했다. 이때 그린 이제현의 영정은 1962년에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제현은 보타산에서 불가의 깊은 힘을 빌려 고려 역사에 대한 긍지를 회복하려는 마음을 <보타산에서>라는 시로 읊었다.

(중략)

찬란한 이 문화를 누가 범에게 내맡기며

창검이 어찌 형제의 싸움에 번뜩이랴.

이 터전 지켜가는 국력을 바로잡아

고려가 번창함을 다시 보리라.

연경의 만권당에서 정인 해월이와 재회하다

그해 5월 말.

이제현 일행은 보타산에서 강향을 끝낸 후 3개월 만에 연경의 만권당에 당도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했던 인연이 이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주지방 촌장 이세웅의 셋째 딸 해월이가 만권당에 와 있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이러했다. 충선왕이 해월이를 고려의 공주로 여기고 중매를 서주겠다고 한 약조를 믿고, 촌장 이세웅이 충선왕에게 올리는 서찰과 함께 자신의 딸을 만권당으로 보낸 것이다.

충선왕은 내심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이 한 약조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현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익재 공, 과인은 청주를 떠날 때부터 해월이의 짝으로 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네.”

“상왕 전하, 당치 않으신 분부이시옵니다. 고려의 귀한 공주를 제가 어찌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겠사옵니까.”

“익재 공, 이것은 과인의 뜻이기도 하지만, 촌장의 바람이기도 하다네.”

“그 무슨 말씀이옵니까?”

“촌장이 해월이를 익재 공의 정인(情人)으로 삼아 달라는 내용의 서찰을 보내왔다네. 공이 허락만 한다면 청소나 하고 심부름하는 종년으로 부려도 좋다는 청이었네. 아마도 해월이가 익재의 높은 학문에 매료되어 아버지를 졸랐고, 촌장도 이에 기꺼이 동의한 것 같네.”

“아니 되옵니다. 꽃다운 처녀의 장래를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중요한 것은 해월이의 뜻이라고 생각하네. 과인은 이미 해월이로부터 익재 공이 자신을 정인으로 받아준다면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는 확답을 받아 두었네.”

“…….”

“과인은 해월이를 만권당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서(司書)로 쓸 생각이네. 그 아이의 학문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해 있어 큰 문제가 없을 거야.”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