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남북정상회담 재벌가 손익계산서

2007년 10월4일 평양, 축포가 쏘아졌다. 남북한 종전선언과 평화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이자 본격적으로 남북경협 포문을 활짝 개막한 축하의 메시지다. 임기 4개월여가 남은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 위원장과 역사적인 ‘10·4 남북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남북경협 차원에서 방북했던 빅5 대기업 삼성, 현대차, LG, SK, 포스코 수뇌부들은 이상하리만큼 표정 드러내기를 자제하고 있다. 이미 지난 정권에서 대북사업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거쳤거나 현재진행형인 사업들도 있다. 즉 대북사업에 대한 대기업들의 셈은 오래전에 끝난 상태다. 또한 경제전문가들과 대북전문가들은 대북경제정책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북사업에 적극적인 진출을 했던 기업들은 투자를 했다가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다. 정부에 등 떠밀리기식 방북을 했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민적인 기대는 져버릴 수 없어 방북은 했으나 실제적으로 적극적인 투자에 대해서는 발을 빼고 있는 기업들. 과연 남북경협은 부활의 도화선일까. 아니면 곧 터질듯 불안한 발밑 지뢰일까. 경제논리로 해석할 수 없어 뜨거운 감자인 대북경협사업. 기업들은 지금 대북경협이라는 늪에 빠져 진퇴양난하고 있는 것일까.


“정상회담 성과가 너무 좋아서 감회가 크다”

현정은 현대그룹회장은 방북 후 대만족을 드러냈다. 한때 대북사업으로 도산의 위기를 겪고 남편인 정몽헌 회장의 자살까지 비운으로 이끈 대북사업의 염원이 이뤄진 듯 깊은 술회를 표현한 것이다.

현정은 회장은 시아버지인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이 터놓은 대북사업 정통성을 이어가는 과도기에 섰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백두산 관광이 내년 4월 이후 가시화되고 개성 관광까지 독점권을 확약 받은 것이 아니냐는 설이 나돌고 있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 ‘밝음’
삼성, LG, SK그룹은 ‘흐림’


그러나 다른 재벌총수들은 표정관리에 여념이 없다. 대부분이 “검토하겠다.” “연구해보겠다” 혹은 무응답으로 일관해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그만큼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결과에 대해서 유동적인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세계정서를 고려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그동안 얻은 실익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백화원 영빈관에 최신형 액정표시장치 (LCD) TV를 기증할 예정인 LG는 구본무 회장이 방북했고 지난해 휴전선 인근에 ‘파주 LG 클러스터’를 건립했다.

이미 LG전자·LG필립스LCD·LG이노텍·LG마이크론 등이 모인 ‘파주 LG클러스터’와 북한의 개성공단을 연계한 ’개성-파주 경제특구’가 이미 몇 차례 제안된 바 있다.그러나 그 동안 LG의 대북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지난 96년 이후 TV 임가공 사업을 재계약 형식으로 진행했으나 북핵사태 이후 위축되고 99년에는 LG 상사가 대북물자교역과 위탁가공 사업으로 총 1400만 달러 규모의 실적을 올린 적이 있지만 현재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단한 상태다.

LG 측도 브라운관 TV의 임가공 사업을 소규모로 진행했으나 주문량이 줄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

이미 2000년과 2001년 대북 이통통신사업을 준비했던 SK도 최태원 회장이 방북했다. 그러나 이통통신 사업은 정부차원에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은 사업이다.

북한은 유럽식 (GSM) 이동통신 기술을 도입해 고위층 인사들과 외국인들이 사용하고 있으나 보안성이 떨어져 문제가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북한은 우리가 사용하는 미국식(CDMA)에 큰 관심을 보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SK측은 예전에 북한지역에서 사용할 통신기지국 장부, 휴대폰, 운영방식 등을 추진한바 있으나 남북경협의 지지부진함으로 인해 현실화 시키지 못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SK측은 미국의 전략물자수출제한 규정으로 인해 규제에서 자유롭지 않고 과거의 이동통신 사업은 ‘단순한 정치적인 고려’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속내는 따로 있다. 이미 북한에서의 이통통신사업은 시기상조이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인 수익창
출이 어렵다는 것이다.

현대·기아자동차는 단기적인 사업은 구상하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남포 평화자동차 주변의 자동차 부품사업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치 않는다고 일축했다. 다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우회적인 계열사를 이용한 사업추진이다.

로템과 글로비스를 중심으로 한 철도연결 사업과 현대제철을 통한 철광석 개발에 참여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마저도 항만,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이 투입된 이후로 예상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한발 멀찌감치 떨어져 관망하겠다는 입장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조심스러운 행보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북사업의 수익성에 대한 의구심뿐만 아니라 명분뿐인 대북사업으로 현대그룹의 도산을 옆에서 지켜봤던 현대 기아차가 타산지석을 삼은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업들마다 아픈 기억
아직도 두려운 그림자


삼성의 경우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윤종용 부회장이 방북했다. 삼성의 경우 지난 2000년부터 평양 인근 대동강 TV공장에서 브라운관 컬러 TV와 오디오 등을 위탁가공 형태로 생산하고 있다. 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도 신사복·스웨터·재킷 등의 의류와 조선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공동개발 센터를 설립해 2001년 남북합작 워드프로세서인 ‘통일 워드’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당시 2008년까지 50억 달러를 투자해 북한의 해주 또는 남포지역에 복합전자단지를 구성할 청사진을 가지고 있었지만 북핵 등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부딪혀 실현되지 않았다.

이에 삼성은 가장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13일 열린 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위원장 이해찬 의원)와 산업·자원업계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서도 드러났다.

대한상의 남북경협위원장이자 박영화 삼성전자 고문은 “임금은 매력적이지만 테러 지원 국가에 대한 제재 때문에 반출물자 제약, 수출 관세 혜택의 장애가 있다” 며 “공장 설립자재 확보도 쉽지 않고 개성공단의 경우 임금보다 비싼 근로자의 식대를 기업
이 부담해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한 대북관계자는 “기업들이 국민적인 기대와 정부의 기대를 거슬리기 힘들어 방북에 참여했지만 대부분이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며 “대북사업은 정치적인 논리와 경제적인 논리가 첨예하게 상충되기 때문에 각 기업들은 국민적 정서에 호소하는 참여성 행사만 집중하고 실질적인 경제협력은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남과 북은 하나다, 그러나…
남북경협 넘어야 할 고개는?


북한은 현재 미국에 의해 적성국교역법 적용 대상이다.

적성국교역법으로 지정된 나라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고 교역을 금지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와 교역하는 상대국에도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법이다. 이에 자동차를 비롯한 전자제품등 대기업의 주요 수출 품목들에 대한 북한과의 교류는 금지된 것이다.

또한 테러지원국이라는 딱지도 세계의 이목을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우리나라 주요기업들은 외국인 지분율이 50%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 당장 실익도 없는 북한에 투자했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핵 등 국제적인 갈등과 정치적인 불안요인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LG, SK, 삼성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도 핵문제로 인해 추진했던 사업을 일시에 접어야했다. 또한 지난 2005년 동남아 탈북자 463명 입국과 관련해 북측이 남북경제협력추진위를 일방적으로 중단시키기도 했다.

소유권 문제도 문제가 걸린다. 북한은 생산수단의 사유를 금하고 있어 특구 지역 외에 공장을 지어도 북측에서 사용권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사업을 접어야하는 위험부담도 가지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남북교역투자협의회 김영일 회장은 지난 15년간 대북투자진출계획을 한 업체 중 500여개 업체가 도산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업들이 망설이는 것은 임기 4개월여가 남은 정권말기에 추진하는 남북경협에 대한 연속성에 대한 의문이다.

결국 정치적인 이슈로 기업들이 더 이상 희생양이 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국민적인 기대와 염원이 뒤엉켜 이래저래 기업들의 대북정책은 깊은 혼선에 빠져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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