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처럼 예기치 않았던 강남 여행은 이제현과 해월이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며칠 후, 이제현과 해월이는 충선왕의 주관 하에 평생을 정인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는 단출한 의식을 갖고 신방을 차렸다. 부덕(婦德)이 남다른 권씨 부인은 충선왕의 제안에 기꺼이 동의를 해주고 두 사람의 신혼 초례를 정성스레 준비해주어 지아비 이제현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마침내 첫날밤을 맞이했다. 어린 신부 해월이는 꽃다운 방년 18세였다. 그녀는 이슬 머금은 포도알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이제현에게로 다가갔다.

“선생님, 저를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해월이, 살아가면서 오늘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소녀는 비록 여자이오나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해월이는 마치 갓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고 아름답구려.”

“저는 소원을 성취했기 때문에 선생님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걱정하지 마오. 해월이를 외롭고 힘들게 하진 않을 테니까.”

해월이의 착한 마음씨는 향기로운 감로수처럼 이제현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녀는 오렌지 같은 봉긋한 가슴, 잘록한 허릿매, 아담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덜 익은 풋사과 같은 그녀의 육체는 태초의 이브가 되어 이제현의 품에 살포시 안기었다. 두 사람은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밤의 장막을 걷고 열반의 문을 열고 있었다. 이윽고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는 탄성의 소리를 내며 해월이는 18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이제현에게 바쳤다.

해월이는 발해만 너머 이정기 할아버지의 고향인 영주를 그리며 자랐지만, 이날 이후 그녀는 푸른 서해 너머 정인의 고향인 개경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외롭고 고독한 운명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청주지방의 촌장 이세웅은 마치 고구려 주몽(朱蒙, 동명성왕)의 두 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의 아버지로 알려진 연타발(延陀勃)을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이후 이세웅은 소금매매사업으로 일으킨 부를 고려 부흥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고 만권당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한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 고려에서 구할 수 없는 서양과 중국의 고금(古今)의 많은 진서(珍書) 8,000권을 구입해서 충선왕의 이름으로 고려에 기증하였다.

이제현은 우리 역사상 누구보다도 중국 땅을 두루 돌아다닌 인물이다. 이 소설에 소개되는 시를 제외하고도 그가 유람한 곳으로 그의 시에 보이는 곳만도 셀 수 없이 많다.

<황화(黃河)>, <맹진(孟津)>, <표모묘(漂母墓)>, <금산사(金山寺)>, <보타굴(寶窟)>, 송나라와 거란의 경계에 있는 강인 <백구(白溝)>, 한무제가 무고에 속아 태자를 죽이고 세웠다는 <망사대(望思臺)>, 자객열전의 주인공 예양이 숨었다는 <예양교(豫讓橋)> 등 이제현은 발자취가 이른 곳마다 모두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의 고사를 두루 소재로 삼아 시를 써서 중국 문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렇듯 이제현은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암흑시대의 아픔을 시로 달랬으며, 원나라의 탄압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정신’을 되살리고, ‘고려의 자존심’을 세우려 무던히도 노력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자기보다 200년 먼저 이 땅에 살다간 이제현을 가리켜 이렇게 평했다.

“옛부터 일컫는 이른바 불후(不朽)라는 것에 세 가지가 있으니 덕(德)과 공(功)과 언(言)이 곧 그것이다. 그러나 덕이 있는 자가 공까지 갖추기 어렵고, 공이 있는 자가 언까지 갖추기 어렵다. 고려 5백년 동안에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 가지를 겸비하고 시종(始終)이 일치하며 높이 솟아 나와서 아무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만한 사람으로는 오직 이제현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이제현 사후 약 500년 뒤에 출현한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도 촌티가 나던 동국(東國)의 시 작품이 익재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에 대해서도 내놓을 만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제현은 참으로 우리나라 2천 년 이래의 대가로서 그가 쓴 시의 화려하고 명랑하며 전아한 품은 우리나라 시의 딱딱하고 꺽꺽한 폐습을 깨끗이 벗어난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이제현을 높이 칭송했다.

“정말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곳을 읊은 이는 오직 이제현 한 사람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킨 한말(韓末)의 김택영(金澤榮)은 이제현의 시를 이렇게 평했다.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을 구비하여 우리나라 한시 사상 제일의 대가이다.”

 

원나라 정쟁에 휘말린 충선왕,
티베트로 귀양 가다

해가 바뀌어 경신년(1320, 충숙왕7)이 되었다.

이제현은 충선왕을 시종하여 절강성의 보타산(普陀山)에 강향한 공을 인정받아 왕명의 출납, 궁궐의 경호 및 군사의 기밀에 관한 일을 보던 밀직사(密直司)의 종2품 벼슬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승차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다. 충선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더욱 승승장구한 것이다.

그러나 1320년 4월. 원나라의 인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원나라 황실에서는 또다시 황제 자리를 놓고 분열과 갈등이 생겼다. 당연히 충선왕은 원나라 왕위 계승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원의 무종(武宗)은 동생인 인종(仁宗)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대신 인종이 세상을 뜨면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로 약속을 받았는데, 인종은 이 약속을 깨고 자신의 아들(영종英宗)에게 양위했다.

인종은 충선왕의 쿠데타 동지이자 후견인이었는데, 그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충선왕은 강력한 지지 기반이 사라져 바람 앞의 등불처럼 미약한 존재로 전락했다. 충선왕은 무종 편에 섰고, 인종의 아들 영종은 즉위 후 무종 세력을 배척했다. 당연히 충선왕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원간섭기’에 원나라 궁정에서 환관의 권력은 고려 국왕을 능가했다. 이러다 보니 고려에서는 출세를 위해 성기를 거세하는 것이 유행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거세하고 형이 아우를 거세하였다. 일단 거세하면 썩은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은 사람도 고려 조정을 우습게 보았다.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는 고려의 노비 출신 환관이다. 그는 원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게 된 후 고려의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며 충선왕을 중상모략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충선왕은 임백안독거사를 미워하여 1320년에 원 황태후에게 청하여 장형(杖刑)을 치고 고려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임백안독거사는 충선왕에게 원한을 가졌고, 승상 팔사길(八思吉)을 많은 뇌물로 매수해서 충선왕을 중상 모함하고 나선 것이다.

그 당시, 충선왕은 원나라 황실의 왕위쟁탈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예전에 불경 공부를 한 적이 있는 남경(南京)의 금산사(金山寺)로 급히 피신을 했다. 그런데 충선왕이 금산사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들이닥친 영종의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그는 연경으로 끌려가 10월에 형부로 넘겨져 머리가 깎인 채 석불사(石佛寺)라는 절에 유폐되고 말았다.

1320년(충숙왕7) 12월.

충선왕은 연경에서 1만5천 리 떨어진 토번(吐藩, 티베트) 살사결(撒思結) 지방으로 귀양길을 떠나게 되었다. 불경을 공부하라는 명목이었다. 유배의 표면적인 원인은 고려 간신의 무고였으나, 실질적 이유는 원 영종이 고려의 국호를 없애고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삼으려는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인 충선왕을 제거하려 했던 데 있었다.

한때 고려와 원나라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충선왕에게 닥친 기막힌 운명, 그것은 ‘원간섭기’ 고려 국왕의 비극적인 운명이기도 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낯선 땅 티베트로 유배길을 떠나는 충선왕의 행렬은 초라하고 처참했다.

유배된 충선왕에게 미래가 없어 보이자 많은 신하들은 그를 버렸다. 재상 최성지(崔誠之) 등은 호종을 거부하고 도주해 버렸다. 오직 직보문각 박인간(朴仁幹)과 대호군 장원지(張元祉) 등 18인이 함께 유배지까지 시종하였다.

충선왕의 유배지는 납살(拉薩, 라싸-티베트의 수도)에서 서쪽으로 450㎞ 더 들어간 황량한 고산지대인 살사결(지금의 사캬사원)이었다. 연경에서 남쪽에 위치한 탁군으로 내려온 뒤, 서쪽의 도시들인 석가장(石家莊), 정주(鄭州), 서안(西安), 난주(蘭州), 타사마(朶思麻), 납살을 거쳐 살사결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고려사절요》에는 당시의 참담했던 고난의 여정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충선왕은 얼음 틈에 끼여 졸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도적떼와 수도 없이 맞닥뜨려야 했으며, 혁선(革船, 가죽배)으로 강을 건너고 소달구지에서 노숙하며 강물에 미숫가루를 타 마시며 반 년 만에야 유배지에 닿았다.

한편, 이제현은 충선왕이 금산사에서 체포되었을 때 고려에서 원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황토점(黃土店)이란 곳에서 ‘충선왕이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고 귀양 갔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충절을 노래한 <황토점> 3수를 지었다.

어지러운 세상 일로 인한 근심 차마 듣기 민망하여 다리 위에 말을 세운 채 문득 할 말을 잊었네.

어느 때나 태양은 아픈 마음 비춰줄까

곳곳의 푸른 산 눈물 흔적에 가리웠네.

잔도(골짜기 다리)를 태운 장량(張良,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이 어찌 신의를 저버렸으리요

목숨 걸고 은혜 갚은 영첩(靈輒,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처럼 일찍이 보은의 길 알고 있네.

아아! 아무 방법 없어 마음 아픈데, 이 몸에 날개 달 방도라도 있다면

구름 낀 하늘에 날아올라 대궐에 가서 한 번 외쳐보련만.

이제현은 황토점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충선왕이 유배당한 사실이 너무도 눈물겨워 연경으로 가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이제현은 한동안의 칩거를 깨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연경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눈 쌓인 황토점 산꼭대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이제현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연경에 도착한 이제현은 만권당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사랑하는 권씨 부인과 해월이가 실의에 빠진 이제현의 말벗이 되어줬지만, 잔뜩 찌푸린 겨울 날씨처럼 점점 참담해지는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는 못했다.

만권당도 옛적의 북적이던 시세(時勢)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학문을 연마하던 원나라 석학들은 가을날 오동잎 떨어지듯 하나 둘씩 뿔뿔이 흩어졌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만권당은 어느새 절간처럼 고요해 졌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하게 다가왔다. 건조하고 매서운 북서풍이 세차게 불어왔다. 황사의 발원지인 고비사막에서 날아온 뿌연 모래 가루가 연경을 온통 은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겨울이 깊어지자 만권당 정원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나무 꼭대기에는 은회색 서리가 내려앉았다. 황량하게 변한 만권당 하늘에 떠도는 까마귀는 까악- 까악- 우지짖고, 밤이면 부엉이가 괴괴이 울었다. 날아드는 모든 새들의 지저귐소리는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서곡처럼 구슬프고 처량하게만 들렸다.


미래를 위한 발탁, 34세의 지공거(知貢擧)


단오(端午)의 유래는 중국 초나라 회왕 때부터다.

굴원(屈原, 전국시대의 정치가·비극시인)이라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다. 그 뒤 해마다 굴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고려에 전해져서 단오가 되었다.

해마다 단옷날에는 녹음방초가 우거진 만권당의 어은이라 불리는 연못가에서 시회(詩會)가 열리곤 했다. 충선왕이 시제(詩題)를 내면 이제현과 중국학자들이 돌아가며 시작(詩作)을 읊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시회가 끝나면 음식을 장만하여 고려 인삼주로 조촐한 연회를 열었다. 충선왕은 이처럼 학문을 좋아하고 서화에 조예가 깊은 풍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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