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남북관계가 급변하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 북미 정상회담까지 이뤄졌다. 최근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까지 기정사실화됐다. 대다수의 언론들은 이 같은 내용들을 보도하며 ‘한반도의 봄’을 조성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평화의 봄’은 아직은 미담(美談) 수준이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순방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북제재 완화에 방점을 찍고 각국 정상들을 설득해 보려 했지만 ‘시기상조’라는 입장만 재확인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까. 문 대통령은 귀국과 동시에 쫓기듯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비준했다. 국제사회와 완전한 ‘엇박자’다. 문제는 이 같은 문 대통령의 ‘과속’과 언론의 ‘호도(糊塗)’가 韓-美, 靑-軍 간에도 ‘엇박자’를 초래하면서 안보 불안을 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북관계에서 국제사회와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文의 ‘과속’, 언론의 ‘호도(糊塗)’에 軍은 ‘갈팡질팡’ 안보 위기 심화
- ‘패션 정치’·‘팔짱 외교’? 마크롱, 제재 완화 요청 이틀 뒤 아베와 “제재 강화”


프랑스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북한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비핵화를 촉진해야 한다”며 프랑스가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무엇보다 북한이 비핵화와 미사일 계획 폐지를 위한 프로세스에 실질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여줄 때까지는 제재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다. 제재 완화는 시기상조라며 에둘러 거절한 것이다.

文 대통령 ‘빈손’ 순방에도
언론·靑 ‘포장’ 일색

심지어 마크롱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의 만남 이틀 뒤인 17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 대북 제재 강화 의지를 또다시 분명히 했다. 일본 측 노가미 고타로(野上浩太郞)관방 부장관은 이날 파리 엘리제 궁에서 1시간 15분간 진행된 회담 뒤 브리핑에서 “미국의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를 뒷받침해 나갈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선 안보리 결의의 완전한 이행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는 데 두 정상이 의견 일치를 봤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이 같은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는 언론사는 많지 않았다. 대신 화기애애한 만찬 사진을 공개하고, 김정숙 여사의 ‘샤넬 한글 재킷’을 보도하며 ‘패션 정치’라고 치켜세우기 급급했다.

▲김정숙-브리지트 마크롱, 루브르 찾아 ‘팔짱 외교’ ▲나폴레옹 방까지 보여준 마크롱…文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환대” ▲문 대통령 “이런 환대 처음”…‘마크롱과 특급 케미’ 등의 기사들이 그것이다.

이후 문 대통령은 지난 19일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만나서도 제재 완화 카드를 내놓았지만 이들의 답변은 마크롱 대통령과 대동소이했다.

이때도 언론들은 실상을 호도(糊塗)하기에 급급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한 발 더 나아가 “그 단계(완전한 비핵화)로 가기 위해서도, 그 단계가 확정되기까지 과정에서도 (제재 완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청와대 측은 아예 “제재 완화를 국제무대 공론의 장에 올렸다는 측면이 있다”고까지 치켜세웠다.

한 술 더 떠 문 대통령은 귀국 직후인 지난 23일 쫓기듯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국무회의의 심의 의결을 거쳐 비준했다.

‘평양선언은 판문점선언의 이행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국회 동의가 필요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지만 이는 유럽 순방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문 대통령의 조급함이 여실히 드러난 대목이라는 게 중론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유럽 순방에서 국제사와의 대북제재 완화 불가 입장을 여실히 느끼고 조급해졌을 것이다”라며 “야당의 총공세는 물론이고 여론도 나빠질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문 대통령 입장에선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NLL, 한미연합훈련 등
靑-軍, 韓-美 ‘엇박자’↑

실제로 평양선언 비준의 파장은 점입가경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 완화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도·도로 연결을 포함해 남북이 실무협의 중인 협력사업에 가속도를 붙이겠다는 선언이다. 정부 의도대로 흘러간다면 국민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수년간 조 단위가 넘는 천문학적 재정이 투입될 수밖에 없다. 야당이 정부의 일방적 비준에 우려를 표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평가다.

더 큰 문제는 문 대통령의 이 같은 ‘과속’과 언론의 ‘호도’가 대한민국의 안보 위기까지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문 대통령과 국방부 그리고 미국 간의 ‘엇박자’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지난 12일 열린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정 여부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의 입장이 엇갈렸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NLL을 인정했다”고 언급한 반면 합참은 “7월부터 북한이 NLL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자료를 내놨기 때문이다.

지난 9월 19일 남북은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4.27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분야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에는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든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는 남북이 합의한 문서에 처음으로 NLL이란 용어가 담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같은 사실을 기반으로 “북한이 NLL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문 대통령은 “북한이 NLL을 인정한 것은 대전환”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지난 12일 열린 합동참모본부 국정감사 비공개 업무보고에서 문 대통령의 주장과는 상반된 내용이 나온 것이다.

이날 합참 국감에서 백승주 자유한국당 의원은 “(합참 비공개 업무보고를 보면) 7월부터 북한 당국이 NLL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이 주장하는 ‘서해 해상계선’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서해 경비계선은 북한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는 대신 자체적으로 설정한 용어다.

한국과 미국의 비질런트 에이스(한미연합 공중훈련) 유예 관련해서도 ‘엇박자’가 표출됐다. 22일 국방부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19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세안확대 국방장관회의’에서 비질런트 에이스 훈련의 유예를 발표했다. 이 훈련은 한·미 항공기 200여 대 이상 대규모로 참여하며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훈련 중 하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은 우리 정부와 협의를 완료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예 사실을 공식화했다. 실제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훈련 유예 결정은 한·미 안보협의회(SCM)를 통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SCM은 오는 3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다.

미국이 12월로 예정된 훈련에 대해 우리 정부와 합의 완료 과정을 생략하고 상당히 이른 시점에 유예 결정을 발표한 것은 ‘동맹국에 대한 신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군 관계자는 “정부의 비핵화 노력을 든든한 힘으로 뒷받침하겠다고 누차 강조한 정 장관은 훈련 유예로 초래될 안보 공백의 우려와 비판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정치권의 관계자 역시 “문 대통령이 ‘과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방부의 입장이 난감할 것이다”라며 “훈련 유예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한국군 단독 훈련 등)을 마련한 뒤 공동 발표할 것을 미 측에 전했는데 미 국방부의 일방적인 유예 발표로 판이 헝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군사합의 비준 강행...
“軍 방위능력 위축 자명”

설상가상으로 14일 열린 국감에선 장거리지대공미사일(L-SAM) 발사 시험이 청와대 지시로 연기됐다는 주장도 나왔다.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군은 국방과학연구소(ADD) 주관으로 지난 4월과 6월 서해에서 한 차례씩 모두 두 번의 L-SAM 시험발사를 계획했다. 하지만 4월 시험발사를 앞두고 6·7월로 미뤄지더니 이마저 무산됐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한 대목으로 비친다.

이 밖에도 수천억 원을 들여 개발한 사단정찰용 무인항공기(UAV)가 9·19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실전투입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국감 자료에 따르면 UAV의 정찰가능 거리는 5㎞이지만 남북 군사합의서의 비행금지구역 설정 거리는 무인기의 경우 군사분계선(MDL) 기준 동부 15㎞, 서부 10㎞다. 군사합의서를 이행하는 다음 달 1일부터는 이 UAV를 MDL 인근에 띄워 북한군 동향을 감시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또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군은 연평도와 백령도 등 서북도서에서의 해상훈련을 전면 중단하고 최소 단위의 육지 훈련만 진행하고 있다. 서북도서 장병들을 경기도 파주·김포 등 사격장으로 이동시켜 임시 훈련을 실시하는 방식이다. 남북이 서북도서를 포함한 서해 완충수역에서 포사격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서북도서의 우리 군부대와 장산곶 일대 북한 장사정포 부대 간 거리는 15㎞다. 사거리가 가장 긴 육지 사격장인 포항 해병대사격장도 10㎞를 넘지 못한다. 실전 사거리에서 포 한 번 쏴 보지 못한 채 최전선을 지켜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비준한 남북군사합의서에는 군사분계선 상공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비무장지대(DMZ) 내 감시초소(GP) 시범 철수 조항도 포함돼 있다. 남북 군사합의 비준으로 인해 우리 군의 방위 능력은 더욱 위축될 것이 자명해 보인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4·27 판문점선언 비준 동의안은 국회 상임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는데 후속 조치인 군사분야 합의서부터 서둘러 비준했다”라며 “복잡한 법 조항과 논리를 구사하기에 앞서 여론이 무엇인지 헤아려야 한다. 지금 대다수의 여론은 청와대가 너무 서두른다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진행 속도를 보면서, 한·미 공조에 문제가 없는 범위 내에서 북한과 회담이나 협상을 진행하라는 여론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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