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는 진실을 알고 있다

오양수산 김성수 회장이 생전에 작성했다는 주식 위임장.

‘발신: 김성복. 3130 Noriega St. San Francisco, Ca 94122. U.S.A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노리에가 거리 3130번지 94122)’
‘수신: 일요서울 박지영 기자님.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05-159 일요서울 빌딩 5F. SEOUL, KOREA (대한민국 서울)’

지난달 28일 늦은 오후께 누런 서류봉투 하나가 기자 앞으로 배달됐다. 의문의 서류봉투 발신란엔 낯선 이름 석 자가 한글로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김. 성. 복.’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무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은 아닌 듯 했다. 일단 봉투를 뜯어보기로 했다. 봉투 안에는 표지까지 포함해 A4용지 14장 분량의 문서가 들어있었다. 표지 겉면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수신 : 오양수산 사태에 의문점을 갖고 계신 분들. 제목 : 그들은 왜 故 김성수 회장의 발인을 늦출 수밖에 없었나. 작성인 : 2008년 1월 오양에 몸을 담았던 전직 임직원, 선원, 노조원 모임. 장소 : 샌프란시스코.》

10여장 남짓한 문건에는 고 김성수 오양수산 회장의 죽음과 관련된 의문점들이 가득했다. 그들이 제기한 의혹을 쫓아 1년 전 벌어졌던 당시 상황을 재현해 봤다.


의혹 1. 고 김성수 회장이 쓰러진 진짜 이유?

전직 오양수산 임직원·노조원 일동이 2008년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작성한 본 문건은 제일 먼저 고 김성수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유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전직 오양수산 임직원들은 “문○○(셋째사위)씨가 사장 겸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2000년 11월, 문씨는 고 김성수 회장을 찾아가 더 많은 지분과 높은 연봉을 요구했다. 놀란 김 회장은 ‘사위라고 사장까지 시켜줬더니 결국 일을 내는 구나’라며 크게 호통을 쳤다.

이에 문씨는 장모인 최 여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최 여사는 남편 김 회장에게 ‘사위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고 했다. 어이가 없던 김 회장은 노발대발했고 이러다 뇌출혈로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들은 이러한 일련의 내용을 알게 된 것에 대해서도 “김 회장이 응급실에서 깨어난 후 최 여사를 가리키며 ‘당신 내가 왜 이렇게 된지 알지?’라고 하자, 최 여사가 ‘너무 죄송해요’라며 사과했다. 또한 김 회장은 이러한 내용을 여러 지인에게 넋두리 식으로 얘기하곤 했다”
고 회상했다.


의혹 2. 창업주 뜻 따라 오양수산 넘어 갔나?

전직 오양수산 임직원들은 “고 김성수 회장의 부인 최옥전 여사와 사위들이 헐값에 회사를 매각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와 관련해 문건에는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약 3개월 만에 고 김 회장이 휠체어를 타고 회사를 둘러보러 왔다. 그러다 그 간의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했는지 김 회장은 여러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오른손으로 최 여사의 뺨을 후려쳤다. 말씀인 즉 ‘이 못된 것들, 회사를 사위놈들에게 넘겨주려한다’는 것이었다”고 적시돼 있다.

고 김성수 회장의 장손녀이자 명환 부회장의 장녀 진형씨는 그때 상황에 대해 “당시 어머니가 현장에 있어서 얘길 많이 들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오양수산 본사 엘리베이터는 오래된 거라 사람이 4~5명밖에 못 들어간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탄 사람은 할아버지와
최 여사님, 어머니 그리고 간병인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벽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고 일어나 다짜고짜 최 여사 뺨을 후리며 호통을 쳤다고 들었다”면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증인들 말을 전했다.


의혹 3. 정신병원 강제입원에 감금생활까지?

전직 임직원들에 따르면 고 김 회장은 ‘최 여사 뺨 사건’이후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들은 “그 사건을 계기로 김 회장은 최 여사와 사위, 딸들에 의해 반 감금상태로 생활하게 됐다. 심지어 정신 멀쩡한 사람을 우울증이 있다고 부추겨 첫째사위 박○○ 검사가
아는 곳인 아산중앙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또 “퇴원 후는 아예 경비회사를 고용해 고 김 회장 댁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며 “고 김 회장의 반 감금생활은 2007년 6월 2일 타계할 때까지 전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반 감금생활의 결정적 단서로 전직 임직원들은 장손녀 김진형 실장과 고 김 회장간의 대화내용을 예로 들었다. 그들은 “하룬 김진형 양이 우여곡절 끝에 철통 경비를 뚫고 김 회장을 만났다. 손녀를 본 김 회장은 눈시울을 붉히며 ‘진형아, 할아버지는 밖에 연락 해볼 데도
많고 회사에도 연락을 좀 해야겠는데 방법이 없으니 네가 핸드폰 두 대만 사다주렴. 뺏기지 않도록 베개 밑에 숨겨두고 쓰도록 하마’라
고 말했다”며 손녀와 할아버지 간의 대화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일련의 사건에 대해 대화 당사자인 김 실장은 “사실이 맞다”고 단언했다. 그녀는 “어렵사리 할아버지를 뵙는데 핸드폰 두 대를 구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도 꽤 어렵게 들어간 거라 두 번의 기회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의혹 4. 부자간 법정분쟁 누가 먼저 걸었나?

오양수산 전직 임직원들은 또 고 김성수 회장과 명환 부회장간의 법정분쟁도 모두 사위와 딸들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문건을 통해 “사사건건 김명환 부회장을 몰아세우던 사위들은 결국 이간질로 김씨 집안을 풍비박살 냈다”고 주장했다.

‘장남인 김 부회장이 장인어른을 고소했으니 장인어른도 재산 등 보존을 위해 맞고소를 해야한다’며 장인어른을 설득, 먼저 장남을 고소케 했다는 게 그들의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병원을 다녀온 김 회장이 아들집에 들렀다가 발각됐다.

문건에 따르면 김 회장은 아들 김 부회장에게 “화해하자, 집안 꼴이 이게 뭐냐. 그런데 왜 너는 나를 고소했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김 부회장이 “제가 언제 아버님을 고소했습니까. 저는 아버지께서 고소장을 보내셔서 하는 수 없이 회사 등 보존차원에서 맞고소장을 낸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의혹 5. 고 김 회장 위임장 사인 진짜냐? 가짜냐?

특히 전직 오양수산 임직원들은 김성수 회장이 죽기 직전 작성했던 위임장에 대해서도 의문스러워 했다. 수천억대 거래임에도 불구, 공증 하나 돼있지 않고 갈겨 쓴 싸인이 아무래도 의심쩍다는 것.

이에 대해 고 김성수 회장의 장손녀인 진형 실장은 “우리도 답답한 마음 뿐”이라며 “감정 결과 싸인은 한국·일본·미국에서 모두 가짜로 판명 났다. 필적은 다 아니라고 나오는데 우리나라 법조계에선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라고 토로했다.

이어 김 실장은 “일본의 저명하신 분께 감정을 요구했다. 그곳의 경우 기술·기계부문 모두 특허까지 받은 매우 유명한 곳”이라며 “감정기간도 한 달 반이나 걸렸다. 그 결과 2006년 6월부터 최근까지 작성된 위임장 싸인이 모두 친필이 아니라고 나왔다”고 덧붙였다.


의혹 6. 왜 하필 샌프란시스코에서 보냈을까?

한국이 아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에게 서류를 보내온 이유에 대해 전 오양수산 임직원은 “미 샌프란시스코에 오양수산 원로인들이 많이 가 있다. 예전부터 임직원들과 연락을 자주하며 안부를 묻고 지내다가 일이 터지자 안타까운 마음에 자발적으로 그곳(샌프란시스코)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문서를 보내온 ‘김성복’씨에 대해선 “그 분이 누군지 아는 바 없다. 하지만 아마 김진형 실장이 알 수도 있을 것”이라며 “지금 긴급회의에 참석해 통화할 순 없지만 오후 5시쯤 회의가 끝나니 그때 다시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기사를 작성 중이던 3월 7일 오후 4시 20분께 한통의 전화가 왔다. 김진형 실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김 실장은 문건을 보내온 김성복씨에 대해 “사실 저희 집에도 기자님이 받으신 서류와 동일한 우편물이 왔다. 이에 사방으로 알아보니 김성복씨는 오양(수산)이 한창 잘 나갔던 시절 회사에 몸담았던 분으로 확인됐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우편물이 온 것도 그곳에 오양의 OB모임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명환 부회장을 제외한 유족 쪽 입장을 듣기 위해 이를 대변하는 법무법인 충정과의 통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그들의 변호를 맡고 있는 장용국·조용연 변호사 모두가 외부 회의참석으로 연락이 두절됐기 때문이다. 이에 사무실 직원과 대한변호사협회를 통해 휴대폰 번호를 얻으려 했지만 ‘개인사생활보호’ 등의 이유로 거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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