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맺히게 울리는 ‘스톡홀름의 사부곡’

71년 추석. 안양관광호텔에서 이원만 회장과 A씨.(좌) · 단란했던 한 때 고 이원만 회장과 딸 B씨.(우)

코오롱은 재계서열 28위, 자산규모 5조 3천억원, 23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위용을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대기업이다. 그러나 코오롱은 지배구조나 경영권 승계로 속내 복잡한 다른 대기업과는 달리,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가족사로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코오롱 창업주 고 이원만 회장의 사랑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코오롱 이 회장의 가족사는 지난 2004년 이 회장의 혼외 아들이라는 이동구씨(30·미국명 피터 로치)가 이 전 회장의 가족들을 상대로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5백만달러(약50억원)의 상속 소송을 제기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고 이회장의 숨겨진 딸(8녀)이라고 주장하는 B(39)씨와 그의 내연의 처라고 주장하는 A(61)씨가 코오롱이 혈육에 대해 비인간적인 처우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본지는 스웨덴에 살고 있는 지씨와 언론사로서는 최초로 전화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코오롱 일가의 혈육전쟁, 그곳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코오롱 창업주 고 이원만 회장은 1920년 4월, 이위문씨를 아내로 맞이해 슬하에 2남 4녀를 뒀다. 이동찬, 이봉필, 이매란, 이미자, 이동보, 이미향씨 등이다. 이중 장남 동찬씨는 현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으로 있으며, 차남 동보씨는 전 코오롱TNS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것은 호적상일 뿐이다.


무심코 찍은 상속포기각서
코오롱 “상류사회 의무 다하라”

이 회장의 내연의 처인 A씨에 따르면 본처 이위문 사이에서 코오롱그룹 이동찬 명예회장과 장녀 이봉필이 태어났고, 윤귀주라는 내연의 처에서 이동보, 큰 딸 이애린, 이미자, 이미향이 태어났다. 또 일본 여인에게서 아들 히로미, 그리고 또 A씨에게 B씨, 이미연과 사이에서 이동구가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즉 4명의 여인에게서 모두 9명의 자녀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코오롱 측에서는 실제 이 회장의 내연의 자식 중 히로미, B씨, 그리고 이동구씨에게는 가혹하리만큼 혈육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A씨는 자신과 이회장의 사이에서 태어난 코오롱 그룹의 8녀인 B씨에게 현금 1억원만을 지급한 채 상속권 포기각서를 찍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A씨가 밝힌 코오롱과의 기막힌 과거사는 다음과 같다.

1994년 2월 14일 이원만 회장이 서울대학병원에서 사망한 뒤 코오롱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에 스웨덴에서 살고있던 B씨는 한국으로 와 이 실장(코오롱그룹 집안을 맡아보는 사람)을 따라 법원 사무실로 갔다. 그곳에서 이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장의 문서였다. 아버지처럼 따랐던 이실장의 권유에 무심코 도장을 찍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혈육의 정을 끊으려는 코오롱의 무서운 속셈이 깔려 있었다.

A씨는 “16살에 스웨덴에 온 이후 공부밖에 모르는 학생인 딸을 강아지 끌고 가듯 데리고 가서 돈 1억 현금을 주고 도장을 찍으라 해서, 이 실장을 믿고, 읽지도 않고 찍으라는 공간에 도장을 찍었다”며 “도장까지 만들어 놓고 서류는 법망으로 피할 모든 조건을 거창한 문자로 나열해 놓고 일은 순식간에 처리됐다”고 주장했다.

A씨는 1969년 4월 자신의 친구와 이 회장의 별장에 놀러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뛰어난 미모를 자랑했던 A씨 주변에는 많은 연예인들이 있었고 그들과 돈독한 친분관계를 유지했었다. 이후 비서라는 사람에 의해 연락이 왔고 그들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회장은 A씨에게 보문동의 집과 이태리 자동차인 피아트를 사주었다고 한다. 매일 보문동 집에서 A씨와 이 회장은 밥을 먹고 바둑을 두는 등 데이트를 했고, 당시 비서들과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계 및 재계인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들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 여자문제 비공개 일화도 공개

그리고 1970년 5월 1일 제일병원에서 B씨가 태어났다. 당시 A씨 나이 22살이었고, 이 회장은 65세였다. 당시 이 실장은 아버지와 닮은 딸 B씨를 신기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이 회장은 비서를 대동해서 곁에 와 좋아했으며 매년 12월이면 일본에 갔다가 1월에 돌아오는 데, 아이의 옷이나 장난감 심지어는 이부자리까지 큰 가방에 담아올 정도로 예뻐했다고 주장했다. 1971년에는 이 회장과 A씨가 세계일주 여행을 했다.

이 같은 스캔들이 한때 정재계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고 한다. A씨에 따르면 이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방문하고 와서는 “청와대를 방문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이 회장은 여자를 좋아한다면서요’라고 물어서 ‘각하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대답했고 박대통령이 ‘나도 좋아하지요’라고 말해 ‘그러면 됐지요’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후 이회장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뉴욕에서 딸이 미술공부를 할 때 학비를 지원했고, 딸에게 코오롱 아케이드와 그 외 회사주식을 주겠다고 하면서 하와이에 가서 살자고 제안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1974년 끝났다. 정식부부도 아니었고 혼외 자녀를 둔 여자로 6년이라는 세월은 짧지 않았다.

또 딸로 인해 마음이 아팠고 이동보(전 코오롱TNS 회장)의 어머니 되는 윤귀주씨가 딸을 데려가겠다고 성화였고, 윤씨의 막내딸인 이미향도 자기 어머니가 자신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1974년 헤어진 이후 이 회장 측에서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여러 번 왔으며나 단호히 거절했다. 이 회장 측은 이런 A씨에게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3년 뒤 77년 이 회장은 다른 내연의 처인 이미연씨를 만나 상속소송을 벌였던 동구가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A씨는 기자와 가진 전화에서 “돈보다 그를 더 사랑했기에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며 “자신과 같은 과거를 가진 사람 중에서는 자살한 여자도 있고, 재판 도중 너무 많은 돈을 잃고 타락한 사람도 있으며, 정당하게 인정해 상속을 해준 재벌들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내가 희생타로 벌거벗을 것이니 이 문제는 꼭 코오롱으로부터 정중한 사과나 해명을 듣고 싶을 뿐이며, 자신의 딸을 이원만 회장의 혈육이라는 것을 서면으로 인정받은 싶은 것이다”며 “재산상속은 차후의 문제이며 그들 마음으로 주면 해결될 것으로 그것이 상류사회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코오롱 측은 기자의 확인 요청에 “지나간 일이고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도, 말할 내용도 없다고 밝혔다.


#‘숨겨진 딸’ 피맺힌 편지에는?
코오롱 코자만 봐도 울분 솟구쳐

코오롱그룹 가족 형제들에게:

안녕하십니까. 저는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여덟 번째 딸 입니다.

이제 저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호적을 바로 잡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스웨덴에 왔지만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밝혀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돈을 상속받을 수 있다 하여도 형제들과 원수 맺는 일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주며 혈육의 정을 주고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집은 고사하고 20년 동안 학비나 생활비도 되지 않는 1억을, 그것도 필요하다고 말한 2년이 지난 9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산상속 포기 공증문서에 서명을 하게 만들며 건네주었습니다. 학교 다니며 얻은 빚이 평생 갚아 나가야하며 집이 없어 집세 내는 돈과 매달 갚아 나가야 하는 빚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나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코오롱의 코자만 보아도 울분이 솟구치고 만나는 사람마다 코오롱 딸이 왜 그렇게 고생하고 사느냐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중략)
어머니로부터 들어서 형제들의 이름과 가족사항을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 있는 집안과 사돈을 많이 맺어서 힘이 막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만 막강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힘이 바르게 사용되지 않으면 어떻게 사회로부터 형제들이 존중받겠습니까.

스웨덴 법과 가족문제 법이 너무나 틀려서 놀라고 이상스러웠습니다. 여기서는 아무리 결혼 외 자녀라 하여도 자녀가 틀림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아들이나 딸이나 동등하게 상속해 줍니다.

(중략)
코오롱이 남북이산 가족 및 그리운 가족 찾기 운동까지 하고 있더군요. 코오롱 가족 사회봉사단이라는 기사를 모두 읽고 형제들에 대한 실망과 절망, 원망, 분노를 느꼈습니다. 좋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 모든 좋은 일이 위선이 되지 않겠습니
까.

(중략)
지금 저는 대학을 나와 직장을 가지고 집 하나 없이 가난하지만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가 죄인이면 저도 죄인이 됩니까?

어렸을 때부터 외롭게 자라므로 형제들이 따뜻한 손길을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코오롱 기업 창업주 이원만 회장의 여덟 번째 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습니다. 형제들에게 깊고 슬픈 정을 숨기고 이러한 공개편지를 써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슬픕니다.


##‘숨겨진 딸’어머니 A씨 인터뷰
지금도 회장님을 사랑한다

▲딸 B씨가 지난 1994년 4월 재산청구 포기각서에 서명을 했다. 최근 갑자기 이런 사실을 공개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딸의 정체성을 찾아주는 일이 소중했다. 딸이 코오롱 그룹의 8녀이며 그에 대해서 다른 형제들에게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또한 스웨덴이라는 먼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블로그라는 작업을 시도하게 됐다. 나는 화가이다.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으로 한번쯤 벌거벗고 세상에 이 사실을 공개하고 싶었다.

▲현재 경제적 상황은 어떠한지.
-스웨덴은 복지국가하더라도 딸처럼 대학을 나온 사람은 월급에서 세금 30%, 40%를 내고 살아야 한다. 나는 그림 한 점을 팔아 재료를 사서 그림을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이니 말 할 필요도 없다. 딸이 확고한 직장이 있으므로 국가에서 받은 집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관리비가 매달 80만 원정도 나간다. 집세와 딸이 대학 다닐 때 국가에서 빌린 돈까지 제하면 간신히 먹고 사는 수준이다. 은행 빚이 1 억 정도 되는 것 같다.

▲코오롱 측에서 전화 특별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나.
-최근에는 전혀 없었고, 1998년 딸이 한국에 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비행기 값으로 3백 만원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코오롱그룹의 집안일을 봐주는 이 실장 자기만 믿으라고 하였으나 10년 동안 연락이 없다.

▲코오롱 측으로부터 1994년 상속을 포기하는 조건을 1억 원을 받은 것이 전부인가.
-전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8살에 온 학생이 지금 39살이다. 결혼할 때 쯤 찾아오라고 했다고 코오롱 집안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일억이라는 돈은 재산상속포기 조건이었다.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날치기 법이며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이 회장과의 잊혀 지지 않은 추억이 있다면.
-셀 수 없이 많다. 매순간 순간 사랑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회장님은 비서가 7명이었는데 회사로 출근하시고 바로 내가 사는 보문동 집으로 찾아오셨다. 음식을 해서 밥을 먹고 나와 함께 내기 바둑을 두었다. 또 나는 이 회장이 국회 나가는 연설문도 써주었다. 회장님은 내가 낮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 2층 서재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좋아하셨다.

▲이 회장은 딸을 많이 아꼈나.
-딸이 한성여중 졸업할 때 회사에서 이회장의 큰 차를 내주고 염 모 비서가 정 모 기사와 함께 졸업을 축하해 주었을 정도로 회사에서는 돌보아 주었다.
그 후 84년 회장님이 병상으로 우석대학병원에 있을 때 새벽 4시에 갑자기 병원에서 집으로 찾아와 딸을 무릎에 놓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고 한다. 딸은 아직도 그 냄새를 기억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