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남북미 관계’ 속도조절 나선 미국, 고심 깊어진 문재인 대통령 
‘안개 속 남북미 관계’ 속도조절 나선 미국, 고심 깊어진 문재인 대통령 
  • 오두환 기자
  • 입력 2018-11-02 22:32
  • 승인 2018.11.02 22:35
  • 호수 1279
  • 2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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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핵협상 속도에 맞춰라? ‘두 바퀴 평화론’ 흔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방한 ‘한국 경고’
문정인 교수 “미국의 입장, 한국 정부가 수용하기 어렵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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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한반도 평화를 향해 갈 길이 아직 멀다. 우리나라, 북한, 미국의 이해관계가 모두 다른 만큼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당장이라도 올 것 같던 통일이지만 아직도 해결할 일들이 첩첩산중이다. 국제사회의 동참을 이끌어 내는 건 둘째 치고 국내 정치권조차 한마음 한뜻을 만들지 못하다 보니 시간만 흐르고 있다.

대화의 주체 중 하나인 미국도 숨고르기에 들어간 모습이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한 동선을 통해 미국의 의도가 뚜렷히 드러났다.

비건 대표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등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지목해 만났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는 ‘조건부 대북제재 완화론’을 펴고 있는 정부의 정확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 가능하다.

특히 임 실장과 윤 실장 모두 대북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인물로, 최근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려는 정부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대북제재 틀 속에서 추진 중인 북미 비핵화 협상 속도에 보조를 맞추라는 미국의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성격이 더 강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미 실무협의체 설치
안전장치 요구?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오후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비건 대표가 어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나기 전에 윤건영 상황실장을 면담했다”며 “미국 측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비건 대표는 전날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면담을 했는데, 그에 앞서 윤 실장을 먼저 찾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북핵 외교담당자가 카운트파트가 아닌 직접 연관성이 더 적은 국정상황실장을 먼저 만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 직책상 1~3차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총괄 실무 비서실이 국정상황실”이라며 “윤 실장은 비건 대표 입장에서 보면 만나야 할 청와대의 실무책임자로 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북특사단장으로 남북 정상회담에 누구보다 깊이 관여했던 정 실장을 제쳐두고 특사단 일원이었던 윤 실장을 먼저 만난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게다가 관련 소식을 숨겨 오다가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나자 뒤늦게 시인했다는 점에서 비건 대표와 윤 실장의 만남에 관심이 쏠리는 것을 청와대가 부담스러워 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비건 대표의 방한 성과에 대한 미 국무부의 발표를 보면 이번 방한 목적이 공고한 대북제재 유지를 위한 미국의 입장을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이 더욱 명확해진다.

로버트 팔라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비건 대표의 방한 결과를 소개하면서 한미 간에 비핵화 노력과 제재이행, 유엔 제재를 준수하는 남북 협력 사업에서 긴밀한 조율을 강화하기 위한 ‘워킹 그룹(실무협의체)’을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김의겸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한미가 조금 더 긴밀한 소통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까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워킹 그룹이) 나온 것”이라며 “그에 대해서 우리 정부도 동의를 했다”고 설명했다.

한미 간에 더욱 긴밀한 소통을 위해 새로운 협의체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정부가 표면적으로 밝혀왔던 한미공조로는 모자랐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역으로 미국 입장에서는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려하는 우리 정부에 미국이 관여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이러한 미국의 노골적인 견제에 고민이 깊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문 대통령이 펴고 있는 ‘조건부 제재 완화론’에 미국이 제동을 건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철도 연결, 북한 내 양묘장 현대화 등 남북 간 경제협력 사업이 정작 본격적인 이행 단계에서 마주한 대북제재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남북이 10월에 진행하기로 합의했던 각종 행사와 회담이 줄줄이 연기되고 있는 것도 달갑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미 비핵화 협상을 견인한다는 문 대통령의 ‘두 바퀴 평화론’도 미국의 동의 없이는 뜻을 이루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를 맡고 있는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이날 코리아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남북한이 속도 조절하라’, ‘북미 핵협상 속도에 맞춰라’라는 것인데 이것은 한국 정부가 수용하기 어렵다. 그러면 남북 관계가 깨진다”며 “모든 것이 인질로 잡힐 수 있어 우리 정부의 입장이 어렵게 됐다”라고 말했다.

미국, 전화회의 요청 후 
취소… 난감한 기업들

지난 9월 평양 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최고경영자들이 방북한 삼성전자, SK그룹, LG그룹, 현대차그룹, 포스코그룹, 현대그룹 등 방북 기업에 미국 대사관이 컨퍼런스콜(전화회의)를 요청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관계자는 1일 “어제(31일) 미 대사관이 실무 파트에 전화를 해 대북사업 계획에 대해 콘퍼런스콜 일정을 조율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오늘 또 해당 계획을 취소한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앞서 미 대사관은 ‘미 재무부의 의뢰’라면서 해당 기업들의 대관담당자들에게 연락했고, 대북 사업 계획 관련 질의를 위한 컨퍼런스콜을 진행할 예정이니 자료 준비 및 일정 조율을 요청했다. 몇몇 기업들은 지난주 이 같은 연락을 받고 콘퍼런스콜 일정을 잡았고, 일부는 조율 중인 상황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미 재무부는 지난달 20~21일 국내 7개 은행에 대북제재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하지 말라는 등 대북제재 준수를 경고한 바 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미국의 반응을 염두해 방북기간 몸을 사렸던 해당 기업들은 미 당국의 콘퍼런스콜 요구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미 대사관이 우리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개별 기업 접촉에 나선 것이 공개되면서 부담을 느낀 것 같다”며 “또 대부분 기업들이 미 대사관과의 컨퍼런스콜에서 전달할 유의미한 내용이 없을 것이란 점도 취소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북 경협 문제에 대해 미국 측이 직접 체크를 하며 상당한 우려와 불만 갖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 사건”이라며 “대미 수출 기업들은 상당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