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1970년대 동유럽 공산권 개척 시작
UN의 모순…남북한 지지 결의안 동시 통과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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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1973년은 남북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해였죠. 박정희 대통령이 미·소 데탕트가 가져온 냉전질서의 변화를 틈타 남북한의 평화공존을 목표로 하는 6·23선언을 했다. 그 무렵 대사는 소련 및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를 모색하기 위해서 외교부 내에 새롭게 조직한 특수지역과로 전속됐다. 당시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했나.

▲ 미국과 소련이 데탕트 정책을 취함에 따라 세계정세가 변화하고 있었죠.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헨리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와 비밀리에 베이징 회담을 주선했고,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성사되었습니다. 한국 정부도 그러한 세계적인 정세의 변화에 대응하여 대동구권 외교를 전개해야 된다는 인식을 갖게 됐죠.

외무부는 정보문화국 산하에 특수지역과를 만들었어요. 당시 김용식 외무장관의 최측근인 이수우 정보문화국장이 특수지역과를 만들어서, 임재택 과장을 임명하면서 각국에서 과원을 차출했죠. 안보과에서 SOFA 일을 담당하고 있던 저는 기획참모로 차출되었습니다. 중국·소련·동구권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가를 끌어모아 과원을 충원했습니다.

미리 특별채용했던 채수동과 최용삼은 [프라우다] 나 [이즈베스티야]를 분석하도록 하고, 중국어 전문가는 [인민일보]를 분석해 보고했죠. 동구권 진출을 위한 정책 기획은 제가 담당했습니다.

수교 전에 동구권 각국과 먼저 우호협력관계를 맺고 싶다는 외무장관 서한을 공산권 각국의 외무장관 앞으로 보냈는데 반응이 냉담했습니다. 수교 전략의 일환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통해서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방안 등 다양한 시도를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1980년대에 동구권과 수교를 할 수 있게 되었죠. 지금은 유럽국 산하에 러시아·CIS과가 과거 동구권 국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 1973년 9월에 첫 해외근무 발령을 받았다. 외교관으로서는 선망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뉴욕총영사관 부영사직으로 발령 났는데 당시 느낌은 어땠나.

▲ 당시 주뉴욕총영사는 김인권 대사였습니다. 당시 총영사관은 뉴욕 5번가에 있는 요지에 소재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에 수출을 많이 해서 무역협회가 파크애비뉴(Park Avenue)에 위치한 빌딩을 샀습니다. 물론 뉴욕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총영사관을 그곳으로 옮기는 작업을 제가 담당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사무실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워싱턴과 뉴욕은 이승만 박사가 활동했던 주 무대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설교했던 교회가 지금도 뉴욕에 남아 있어요. 이승만 박사는 뉴욕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남궁염 초대 총영사를 통하여 메트로폴리탄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건너편에 관저를 매입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조치였습니다. 교민 담당을 했던 저는 장면 총리가 임명한 임창영 전 주UN대사가 선봉에 서서 반 박정희 정부 시위를 빈번히 하는 바람에 고역을 치렀습니다.

- 유신체제 직후라 반정부 활동이 더욱 심했을 것 같은데.

▲ 예. 제가 1973년에서 1976년까지 뉴욕에 근무했는데 지금 말씀하신 대로 1972년 유신헌법이 채택되고 유신체제가 수립된 직후였기 때문에 특히 제임스 시노트(James P.Sinnott) 신부님 같은 분이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앞장서서 반정부 시위를 했습니다. 물론 일부 교민들도 참여했지요.

- 뉴욕총영사관이 있는 곳에 UN이 있다. 대UN 업무가 중요했을 것 같은데.

▲ 당시 한국 외교에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매년 UN에서 확인받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대한민국 외교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UN에서 지지를 받는 정통성 확보 외교를 펼치는 데 치중했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 오는 외상들을 대접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내는 활동이 외교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시기입니다.

- 국제무대에서 남북한 사이 정통성 경쟁이 아주 치열했던 시기였을 것 같다.

▲ 그렇습니다. 제일 치열했던 시기예요. 외무장관이 직접 UN에 와서 진두지휘를 했어요. 총영사관은 교민 관련 업부가 주 업무지만, 대UN 외교를 뒷받침하는 일도 주요 업무였습니다. 김동조 장관이 직접 오셔서 대한민국 각국 주재 대사들을 총지휘할 때 제가 장관 보좌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UN에서 남북한이 각각 치열한 경쟁을 벌여 상충된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는 해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비동맹국가를 총동원해 북한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한국은 서방 진영을 총동원해 한국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겁니다. 그런데 남북한지지 결의안이 동시에 통과되면서 UN의 모순이 드러났습니다. 상충되는 결의안이 통과된 시점이 1975년 9월인데, 그 사건에 대한 책임 문제로 장관이 교체됐죠. 한국 문제 UN 불상정 정책을 주장한 박동진 주UN대사가 외무장관이 됐습니다.

- 일종의 문책성 인사가 아니었는지.

▲ UN에서의 외교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박동진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건의한 것 같습니다. 건의 내용이 우리 외교에 큰 획을 그은 사안이기도 합니다. 박동진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대한민국이 UN에 의해서 수립되고, 6·25전쟁 당시 UN에 의해서 나라가 지켜졌기 때문에 UN에서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 지금까지 중요했지만, 더 이상 UN 의존 외교는 국력 낭비라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한국 문제를 UN에 상정하는 외교는 지양해야 한다는 불상정안 건의가 채택됐습니다.

그 이후 대한민국은 UN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남북한 외교 대결이 중단되어 아프리카 등 오지에 과도하게 설치되어 있던 재외공관이 축소되었고, 북한도 아프리카에 대한 과대한 원조를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북한 공히 불필요한 과당경쟁을 지양하게 된 거지요.

외교의 큰 전환점이 된 1975년 UN에서 일어난 상충된 UN 결의안 채택 사건을 제가 직접 목도했습니다. 박동진 대사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김동조 장관을 대통령 외교특보로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1976년에 3년 뉴욕 임기를 마치고 귀국을 했을 때, UN의 인연으로 김동조 외교특보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청와대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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