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 떠난 뒤 ‘암 투병’ 극복 부인 최명길 내조 ‘덕’

[일요서울ㅣ홍준철 기자]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대표가 화제에 올랐다. 폐암4기를 선고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획기적 신약을 투여받아 완치되고 있다는 보도가 알려지면서다. 무엇보다 부인 최명길 씨의 내조가 한몫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한길-최명길 두 인사가 포털 검색창에 오르기도 했다. 작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해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가진 그다. 또한 한 번 이혼 끝에 최 씨와 재혼하는 등 개인사 역시 순탄치 않은 삶이다. 한 권의 소설책으로도 모자란 그의 인생사를 살펴보자.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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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정주영 회장 부대변인으로 정계입문
- DJ·노무현 대선 승리 이끌어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폐암 투병 중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는 2017년 10월 폐암 선고를 받았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지난 4월 암세포가 폐 밖으로 전이됐다. 폐암 4기였다. 김 전 대표는 “10명 중 한두 명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획기적인 신약을 사용했다”며 “나한테도 효과가 있어 암세포가 제어됐다. 이대로 가면 완치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정치권 대부분은 김 전 대표의 암 투병 사실을 몰랐다. 김 전 대표는 “내가 전혀 이야기를 안 해서 가까운 사람들도 몰랐다”며 “누구도 안 보다가 이렇게 멀쩡한 사람처럼 된 뒤에야 만났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한때 체중이 20㎏ 가까이 빠졌으나 현재는 거의 회복한 상태로 알려졌다.

안철수 ‘야권연대’ 갈등, 정치권 떠나 야인으로

김 전 대표가 정치권을 떠난 것은 2016년 20대 총선직전이었다. 김 전 대표는 야권의 ‘창조적 파괴’를 외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와 함께 공동창업에 나섰으나 야권연대 문제를 둘러싼 안 전 대표와 갈등으로 총선에 불출마하고 백의종군을 선택했다.

김 전 대표는 상임공동선대위원장직을 던지며 배수의 진을 치고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추진했지만 안 전 대표가 사의를 수용하면서 사실상 결별 수순을 밟게 됐다. 당시 야권연대 공동전선을 펼쳤던 천정배 전 대표마저 등을 돌리고 민주당이 김 전 대표의 지역구 ‘무공천’ 방침에서 전혜숙 의원을 공천하면서 결국 야인으로 돌아갔다.

김 전 대표의 정치 경력은 자못 화려하다. 고(故) 김철(1926~1994) 통일사회당 당수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 의원은 혁신계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적잖은 고초를 겪으며 성장해 왔다. 또한 도미(渡美) 생활을 거쳐 1991년 베스트셀러인 ‘여자의 남자’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TV프로그램 진행 등으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다.

김 의원은 1992년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통일국민당에서 부대변인을 맡아 처음 정치권에 입문했다. 직함은 부대변인이었어도 정 회장의 얼굴도 한번 못 본 그가 정 회장 출장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이른바 공산당 발언 파문과 관련된 성명서를 내면서 주목받았다.

이후 정 회장에게 불려간 그는 이유를 설명해야만 했다. “결론만 짧게 말해!”가 트레이드마크인 정회장은 그의 말을 2시간 동안 경청했다. 그 뒤 하룻밤 만에 공사를 마쳐 다음 날 아침 정회장 옆방에 그를 위한 ‘특보실’이 마련됐다.

이후 YS의 입당제안을 거절한 김 전 대표는 자신을 눈여겨본 DJ를 선택해 15대 대선 때 DJ의 이미지메이킹을 총지휘하며 편애를 받았다. DJ는 그에게 두 번이나 전국구 공천을 줬고 청와대 기획수석, 문화부장관을 맡겼다. 당시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강래 의원과 함께 김 의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생각해 내는 사람”이라고 술회했다. 김 전 대표는 박지원 의원과 더불어 ‘우지원-좌한길’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김 전 대표의 역량은 노무현 정권의 탄생에 일조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됐다. 2002년 대선에서는 기획을 총괄하면서 방송 대책을 책임졌다. 선거 광고의 백미라고 불리는 ‘노무현의 눈물’ 역시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를 성사시키면서 두 번째 정권 창출을 이루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2006년 원내대표를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당시 최대 계파인 정동영계에 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2006년 지방선거에서 당이 참패하자 김 전 대표는 노 전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김 전 대표는 2007년 대선을 앞두고 23명의 의원과 동반 탈당해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친노 세력과 결별했다. 이후 김 전 대표는 민주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을 만들었다가 박상천 대표체제의 민주당과 통합해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다. 2007년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 4년간 여의도를 떠나 있다 19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총선·전대·암투병 뒤에 최명길씨 내조 빛나

특히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8대 대선에서 패배하자 이듬해 전당대회에서 그는 정치 입문 20여 년 만에 제1야당의 당수로 올라섰다. 제1야당의 당수가 된 김 의원은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이끌었던 새정치연합과의 합당을 추진, 새정치민주연합을 탄생시키면서 재차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이 2014년 지방선거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당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고,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면서 김 의원은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김 의원은 새정치연합의 분당 국면에서 탈당을 결행했고, 안 대표와 손잡고 제3정당인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창당과 탈당을 자주 하다 보니 정치권에서는 ‘신당창당 기술자’, ‘탈당 전문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인간 김한길로 그의 인생을 보면 소설같은 삶이었다. 암투병을 이겨냈던 배경으로 ‘획기적 신약’도 한몫했지만 부인인 배우 최명길 씨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

김 전 대표는 “우리 집사람이 애들 챙기듯이 나를 너무 잘 챙겨줬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늙을수록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밝힐 정도로 애정을 과시했다. 김 전 대표는 최근 방송에 나와 최 씨에게 프로포즈했던 날에 관해 밝혔다.

김 전 대표는 “정확히 24년 전 9월 15일 아내 최명길을 만났다”며 “내 라디오 프로그램에 최명길을 초대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생방송 중이었는데 내가 먼저 대시했다. 그날 최명길과의 첫 통화에서 ‘나한테 시집올래요?’라고 프러포즈했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부인 최 씨가 정치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총선, 전당대회 등 선거에 나설 때마다 유명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선거 지원에 나서면서다. 김 전 대표 역시 지난 당대표에 당선된 배경은 부인이라고 밝힐 정도다.

2013년 5.4 전당대회에서 최씨는 민주당 당심의 중요한 축인 광주·호남 지역의 당대표 후보자 합동연설회장에 나타나, 당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당시 민주당 대의원들은 최명길 씨와 사진을 찍으려고 줄 지어 기다리기도 했다.

최씨는 4.24재보선이 열리는 지역인 부산 영도 등에서 김 전 대표와 민주당 후보를 위한 지원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최 씨의 진가는 전당대회에서다. 전대가 열린 경기 일산 킨텍스에 동료 탤런트인 황신혜·김성령 씨까지 데려와 민주당 대의원들에게 김한길 의원을 향한 한 표를 당부했다. 민주당에는 중장년층 당원이 많은 편이라, 김 전 대표가 당선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김 전 대표는 베스트셀러 소설인 ‘여자의 남자’를 출간한 소설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첫 가정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작가이자 전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씨의 딸 故 이민아 씨다. 이 씨는 김 전 대표가 대학생이던 시절 그가 올린 학보사 글을 보고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해 결혼에 성공했다.
1981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6년 만에 파경을 맞았다. 특히 이 씨의 불운한 인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국민들로부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씨는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졸업한 후 김한길 전 국회의원과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어령 장관 ‘딸’과 이혼 순탄치 않았던 가정사

1989년부터 2002년까지 LA 지역 부장검사로 일하며 청소년 범죄 예방에 노력했다. 그녀의 첫 번째 시련은 김 전 대표와 이혼이다. 그녀는 저서에서 “그토록 일찍 결혼했던 것도 절대적인 사랑을 줄 것 같던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 때문이었는데 그 상처가 다시 찢어졌다”며 “나는 절대로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절망에 빠졌었다”고 전했다.

그녀는 재혼 후 암 투병을 하다가 2006년엔 망막이 손상돼 실명 위기에 처했다. 이후엔 버클리대를 졸업한 큰아들이 26세 나이에 원인 불명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아들은 자폐 진단을 받았다.

결국 이씨는 변호사직을 관두고 목사로서 삶을 살다가 암 투병 끝에 2012년 3월15일 향년 53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당시 김 전 대표는 이혼과 관련해 “그 때 그 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대가”라고 회고했다. 그 이후 김한길은 최명길을 만나 현재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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