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유대 관계 악용한 ‘성범죄’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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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10대 청소년들이 ‘그루밍 성폭력’의 마수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마부(groom)가 말을 깨끗이 씻기고 단장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이 단어는 어떻게 성폭력과 결합됐을까. 일요서울이 그루밍 성폭력 실태와 문제점에 대해 알아봤다.

 

‘길들이다’라는 뜻의 그루밍…정서적 유착 관계 형성 후 성범죄 저질러
성폭력 피해 중 반복·지속성 두드러져…“1회 이상 성폭력” 67.7% 

 

인천 소재 한 교회에서 청년부 목사로 재직한 김모씨가 10대 여성 신도들을 상대로 전도사 시절부터 지난 10년 동안 그루밍 성폭력을 자행했다는 사실이 보도돼 연일 논란을 낳고 있다.

이 사건은 김 목사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은 지난 6일 서울 연지동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해 “우리는 수년간 그루밍 성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했다”며 “우리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하거나 그 사역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지) 더 많은 피해자가 있다”고 고발했다.

앞선 지난달 30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인천 ***교회 김**, 김**목사를 처벌해주십시오”라는 글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게시물에서 김 목사의 그루밍 성폭력 행태를 밝히면서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용기를 낸 피해 여자 아이들은 총 5명이지만,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해자가 최소 26명이나 더 있다”고 토로했다. 이 청원은 1만275명(지난 9일 기준)의 동의를 얻었다.

 

피해자, 성폭력 인지
쉽지 않아

 

이 사건을 접한 이들은 김 목사가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청원자는 “김 목사가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렀던 때 피해 아이들은 미성년 시기였다”며 “현재 이들은 모두 20대 초반의 성인이 돼 증거자료가 불충분하고 미성년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그루밍 성폭력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정서적으로 돈독한 관계를 맺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자행되는 성폭력이다. 

피해자는 자신이 성범죄에 노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따라서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인지했을 땐 당시부터 많은 시간이 흘러 가해자에 대해 현행법상 처벌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 그루밍 성범죄자들이 이 점을 악용하는 것 아니냐며 허술한 현행법망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선이 활동가는 “(피해자는 그루밍 성폭력을) 인지하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단언했다.

그에 따르면 당초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성적인 요구를 배제한 채 ‘예쁘다’ ‘착하다’ 등의 칭찬을 늘어놓거나 ‘나는 네게 뭘 해줄 수 있다’ ‘네게 충고나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접근한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자신에게 성적인 요구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것이라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두고 선이 활동가는 “그루밍 성폭력 가해자는 처음부터 (피해자에게) 본인이 목표로 하는 (성적인) 것을 해 달라 (요구)하지 않는다”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목표로 하는) 그 행동에 결국 도달할 수 있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피해자와 어느 정도 정서적 유착 관계가 형성되면 가해자는 점차 성적인 요구를 해온다. 하지만 이 역시도 ‘네가 좋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너를 아끼기 때문에’라며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피해자가 이를 성폭력이라 여기기 어렵게끔 유도한다.

선이 활동가는 “(피해자가 그루밍 성폭력을) 인지하지 못해 지속적으로 피해 입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지했을 땐 너무 오랜 기간, 혹은 강한 가해가 있었을 때”라고 말했다.

 

청소년 성범죄 중
그루밍 43.9%

 

실제 그루밍 성폭력은 아동과 10대 청소년을 상대로 주로 발생하는 범죄다. 가해자들은 이들이 성인에 비해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 미숙하다는 점을 파고든다.

탁틴내일 아동·청소년 성폭력상담소는 지난 8일 2014년 7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3년 간 접수한 총 78건의 20세 미만 피해자의 성폭력 피해 상담 사례 분석 결과를 내놨다. 이에 따르면 이 중 그루밍 성폭력은 34건으로 전체 43.9%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들의 나이는 ▲14~16세(44.1%) ▲17~19세(26.5%) ▲11~13세(14.7%) ▲6~10세(14.7%)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이 조사에 참여한 6~10세 아동의 경우 모두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로 알려져 이에 대한 심각성이 대두됐다.

탁틴내일 이현숙 상담소장은 “아동과 청소년이 그루밍 성범죄에 많이 노출되는 이유는 그루밍 수법 등을 판단하기가 어려워서다”라고 해석했다.

계속해서 “(환경·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아이는 접근하는 어른에 대해 쉽게 신뢰”하며 “어른의 욕구나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아동의 심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루밍 성폭력은 피해가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생기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탁틴내일의 조사결과 1회 넘게 반복된 성폭력 피해를 본 사례는 전체 48.7%였으나, 그루밍 성폭력 피해자 집단에서는 67.7%로 더 높게 나타났다.

아울러 피해 기간은 1년 미만(20.6%)이 가장 많이 꼽혔으며 ▲1~3년(11.8%) ▲4~6년(11.8%)이 동일하게 드러났다.

탁틴내일은 “그루밍 성폭력이 특히 심각한 이유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라면서 “피해자들은 스스로 학대당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때로는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아동과 청소년의 취약성을 이용한 그루밍으로 성적 착취가 일어날 수 있고 이 과정들은 외형적으로 모두 아동·청소년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이해하면, 그루밍에 의한 성적 접촉은 모두 폭력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상담소장에 따르면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아동·청소년에게 별도 만남 권유 ▲이유 없는 선물 제공 ▲놀러가자며 회유 ▲차에 동승 제안 ▲집 방문 유도 등 기본적인 선을 넘는 경우 그루밍 성폭력 전조 단계를 의심해 볼 수 있다. 또한 온라인상에서 개인 정보나 부적절한 사진 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이 상담소장은 “(그루밍 성폭력 여부를) 가장 판단하기 좋은 건 보호자에게 알리지 않고 둘이 만나자고 했을 때”라며 이러한 행동이 있을 경우 경각심을 가질 것을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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