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때 공신들에 의해 왕이 됐지만 그 공신들을 어떻게 다뤘느냐에 따라 태평성대를 구가한 유능한 군주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무능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된 예가 있다. 인조 이종과 태종 이방원이 그들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들에 대한 빚에 정통성 결여라는 태생적 콤플렉스까지 더해진 인조는 집권 내내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능양군이라는 힘없는 왕손으로 있다가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갑자기 왕이 된 인조는 선조의 서얼인 정원군의 아들이었다. 역시 서얼이었던 광해군보다 정통성이 취약했다.

여기에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절차로 왕이 됐다는 점에서 인조는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 한양 지배층의 인조에 대한 거부감은 의외로 컸다.

이렇듯 공신들의 힘으로 왕이 된 인조는 자신의 의지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후금(청나라)과의 중립외교를 버리고 명나라를 사대해야 한다는 공신들 주장을 따르다 병자호란을 야기해 청태종 홍타시 앞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를 하는 ‘삼전도 굴욕’을 자초했다.

그 후폭풍으로 인조는 청과 치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고 세자 형제와 수십만 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또 굶어죽는 백성들이 속출하는 등 나라에 해악을 끼치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안겨주었다.

인조의 ‘빚쟁이 콤플렉스’는 청나라 조정의 지지를 받던 큰아들 소현세자와 귀양처의 광해군에까지 발산했다.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노심초사했고 광해군 복위를 내세운 반란의 두려움 속에서 평생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결국 인조는 정치적 채무와 정통성 결여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재임 기간 온갖 치욕을 겪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조선조 최악의 무능한 왕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태종임금은 세종에게 정치적 채권자 하나 없는 태평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 역시 형제들을 죽이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으나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공신들에게만큼은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둘씩 제거해버렸다. 이숙번, 이거이, 척족 민 씨 일가 등 수많은 정치적 채권자들을 사정없이 유배 보내거나 처형했다. 상왕 때는 세종의 척족 세력까지 일찍 제거해버렸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다음 세종시대 조선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의 태평성대를 가져왔다.

최근 문재인 정권 탄생의 공신이라 자처하는 민노총이 민생경제가 파탄이 날 지경인데도 자기들만 배불리 잘 먹고 잘살겠다며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총파업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판이다.

문 정부 집권 후 민노총의 요구에 쫓기는 정책을 펼치다 고용, 투자 등 주요 경제지표가 일제히 글로벌 금융위기와 IMF 외환위기 당시 수준으로 곤두박질치고 소비심리와 기업체감심리가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다. 여기에 조선, 자동차 등 전통 주력 산업의 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고용 상황은 처참한 수준이다. 실업자 수는 IMF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9개월 연속 100만 명을 넘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민노총은 무리하고도 불합리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고 이에 대처하는 문 정부는 어정쩡한 스탠스로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있다. 문 정부 1년 반 사이 민노총 가입자는 10만 명이나 늘어났다.

이대로 문 정부가 민노총에 ‘정치적 빚’을 인정하는 ‘채무자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통치무능의 핵심인 백성을 가난하게 한 정부로 남을 수밖에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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