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박동선 비공식 라인, 결국 불법 로비 연루… 쌀 수입 중단
베트남 파병 시 안보 공백… 北 위협 이유로 美 보상금 받아내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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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 대사는 뉴욕 근무 이후 1976년 7월에 대통령 비서실 외교특보 보좌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외교부에서 청와대로 파견 명령을 받았는데, 외교특보 보좌관은 어떤 자리인가? 당시 대사가 그 직책에 발탁된 특별한 이유나 과정이 있었나.

▲ 뜻밖의 반전이 발생했다. UN에서의 모순된 결과로 분위기가 굉장히 침울해서 외교라인이 대폭 개편되리라고 예상했다. 김동조 장관은 몇 달 쉬었다가 바로 1976년 초에 대통령 외교특보가 됐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특보 시스템은 훌륭한 장점을 가진 제도라고 생각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선임 외교특보로 이용희 전 통일부장관, 국방특보로 서종철 전 국방부장관, 경제특보로 신병현 전 한국은행 총재, 또한 새마을 담당 특보 박진환 농협대학교 총장 그리고 사회특보로 장동환 성균관대학교 교수, 안보특보로 김경원 고려대학교 교수를 임명했다.

특보실의 역할은 대통령의 직무 수행에 필요한 국정철학과 국정목표 보고서를 만들고 대통령에게 수시로 조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 수석들은 대통령과 상하관계에 있기 때문에 허심탄회하게 국정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국정에 대해 자유롭게 조언하고, 민심을 파악하며 수시로 대화를 통해 직언하는 인사가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보제도를 활용해서 국가의 기틀을 잡으며 민심을 파악해 통치했다. 박종홍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특보로 있었을 때 교육헌장을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국정철학은 민족중흥이었다. 특보는 국정 목표와 주요 정책에 관한 직무지침을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대통령은 국가를 운영하는 청사진을 가지고 체계적이고 거시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김동조 특보는 박동선 사건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이 미군 철수 방침을 밝혔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의회에 로비를 전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쌀 수입권을 박동선 씨에게 주고 그 수수료를 비자금으로 쓰도록 허용했던 것 같다. 정식 외교라인을 통하지 않은 비선라인 활동을 했기에 말썽이 생긴 거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식 라인에서도 보고를 받지만 비공식 라인에서도 보고받기를 원한 것 같다. 그것이 문제가 됐다.

박동선은 조지타운대학교를 다니고 조지타운클럽을 운영하면서 미국 의회 인사들과 인맥을 쌓았다. 이들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별도 라인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해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모양이다. 박동선이 이를 이용해 각종 불법 로비를 했고 그렇게 박동선 사건이 불거졌다. 그 때문에 PL480에 의한 쌀 수입은 중단됐고, 한·미관계는 한동안 진통을 겪었다.

-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미국 조야의 반감이 많이 작용한 것 같은데.

▲ 박동선 사건으로 김동조 특보가 재임 내내 여러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당시 미국 법무성의 벤자민 시빌레티 검사가 파견돼 박동선 씨를 서울에서 직접 심문했다. 사건의 결론은 한국이 불법으로 미국 의회활동을 방해했고, 그에 대한 처벌 조치로 PL480에 의한 쌀 지원을 중단한다는 것이다. PL480은 미국의 남아도는 쌀을 우리나라에게 원조해 주고 그것을 우리 정부가 팔아 국가 재정에 쓰는 제도인데, 액수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쌀이 오히려 우리 식량의 증산을 저해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잘된 결과다. 그러나 PL480 지원 중단 조치가 취해졌을 때 김동조 특보는 사표를 내고, 바로 석유개발공사 초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제가 터득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리더십에 관한 거다. 박정희 대통령은 확고한 국정철학을 가지고 청사진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리더십을 훌륭하게 발휘했다. 청와대 근무를 통해 국정 전반에 걸친 안목을 키울 수 있었고 국정을 대통령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추게 됐다.

- 대사가 청와대 외교특보 보좌관으로 근무 당시 등장했던 또 다른 이슈가 주한미군 철수 문제였다. 베트남 파병 문제와 인권 문제도 있었는데.

▲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김경원 특보가 청와대를 방문하는 무수한 외국 사람들을 만나서 설득했고, 훌륭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존립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생존이다. 따라서 생존이 인권보다 우선한다. 그리고 민주주의에는 나라마다 상이한 특색이 있으며, 한국의 제도는 민주적인 요건을 다 갖춘 손색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핵심 논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을 위해 우리 군대를 빼서 투입하면, 안보에 공백이 생기므로 미국이 이를 보상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미국을 설득했다. 논리로 설득하는 것이 중요한 협상 전략이다.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고 있는 만큼 방위력 약화를 보상하라는 논거로 미국을 설득해서 보상금으로 국방력을 현대화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기틀을 마련한 것은 탁월한 외교적 통찰력의 결과물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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