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1321년(충숙왕8) 4월. 부전자전이라 할까. 충숙왕도 아버지 충선왕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그는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에서 절치부심하며 3년을 보내게 된다.

충숙왕의 원나라 소환으로 고려는 사실상 국왕 궐위상태가 되었다. 상왕인 충선왕은 이미 1년 전부터 티베트에 유배되어 국왕으로 복귀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왕고가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였다. 이로써 고려에서는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었다.

한편, 정의감이 남달리 강한 최해는 요양로 개주판관에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그 해 9월 초에 갑자기 귀국했다. 이는 최해가 이제현과 함께 심양왕을 추대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해(1321년) 9월 중순. 충숙왕의 빈자리로 조정이 어지러운 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이제현은 송악산에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처럼 남들이 뭐라 하든지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불행은 겹으로 온다’고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이 병환으로 운명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제현이 조정의 혼란과 아버님의 병환으로 하루하루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골목길을 돌아 수철동집 대문으로 황급히 말을 달려오는 청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숙부님, 익재 숙부님!”

청년은 대청마루에 서성이는 이제현을 발견했는지 목 터지게 소리쳤다. 귀에 익은 목소리. 청년은 충렬왕 21년(1278)에 성균시 문과에 장원하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져 있던 백씨 이관(李琯)의 큰아들인 장조카 석종(石種)이었다.

이제현의 뇌리 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아버님에게?”

이제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석종이 가지고 온 비보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숙부님! 대체 이 일을…….”

“무슨 일이더냐? 무슨 일이기에 그리 허둥대느냐?”

“숙부님, 할아버지께서 위중하십니다. 아침부터 신열에 시달리시더니 의식이 혼미하십니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이제현은 급히 말을 달렸다. 그는 오직 아버님의 의식이 회복되기만을 빌면서 채찍을 휘둘렀다.

‘아버님, 소자가 가옵니다. 제발 그때까지…….’

이제현의 기도가 천지신명에게 전해진 것일까. 백씨 댁에 당도한 이제현이 아버지가 누워 계신 방문을 열었을 때, 이진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버님……!”

이제현은 울부짖었다. 절규와 같은 그의 통곡을 지켜보던 큰형 이관과 형수, 동생 이지정(李之正), 그리고 조카들은 눈시울을 적시었다. 이 자리에는 둘째 형 체원(體元) 스님도 합장하고 있었다. 체원 스님은 20세 전후에 출가해서 선불장(選佛場)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충선왕의 지우(知遇, 자기의 학식을 남이 알고 후하게 대우함)를 받아 법수사·반룡사·해인사 등지의 화엄종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후 명찰(名刹)의 주지직을 제수 받기도 하였으나 노부모의 부양을 위해 이를 거절하고 이관의 집에서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다. 체원 스님은 한시도 아버지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탕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고 올리는 효자였다.

“오, 제현이 왔느냐…….”

“예, 아버님…….”

“이 아비는 이제 틀렸는가 보구나…….”

“아니옵니다. 아버님. 기력을 회복하소서…….”

“생자필멸이라고 했느니……다만, 내 너에게 일러줄 말이 있느니라.”

“말씀하소서.”

“나라에는 하루라도 왕이 없으면 안 되는데…… 지금 상왕과 왕이 모두 궐위되어 있어. 이는 고려가 창업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야.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는 모름지기 종사를 먼저 걱정해야 하느니라…….”

목숨이란 정말로 속절없는 것일까. 종사의 일만 걱정하고 집안을 위해 전하는 마지막 유언도 다하지 못한 채 이진은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방안은 온통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아버님, 흑흑흑!”

관직에서 은퇴한 뒤 시와 술로 소일하던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의로운 선비의 길을 걸어온 이제현의 뒤에는 아버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가르침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런 학문적인 스승이 세상을 버린 것이다.

정승을 지낸 이진의 죽음에 조문객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평생지기인 박충좌, 안축, 최해가 문상 와서 한 목소리로 이제현을 위로해줬다.

“작고하신 어른은 복된 인생을 사셨네. 자손들이 모두 번성하고 어른도 천수(天壽)를 다하시지 않았는가.”

이제현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아닐세, 나야말로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이네. 어버이의 은혜는 넓고 큰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거늘, 종사의 일을 본답시고 지난 세월 아버님께 대죄를 지었네. 그 죄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지 하늘이 두렵네. 진(晉)나라 왕상(王祥)은 계모를 위해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드렸고, 오대의 맹종(孟宗)은 한겨울에 노모를 위해 눈물로 대숲에서 죽순을 돋게 했지만, 나는 아버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네.”

장례를 도와주고 있던 문생인 이곡, 안보, 백문보, 윤택 등은 스승 이제현의 건강을 크게 걱정했다.

“스승님, 통곡을 하시다가 벌써 몇 번이나 까무러치셨사옵니다. 이제는 너무 절통해 하지 마시오소서. 몸이 상하실까 걱정이 되옵니다.”

발인을 끝낸 이제현은 아버지를 선영의 발치에 모셨다. 이후 벼슬을 그만둔 뒤 못 다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시묘(侍墓)살이에 들어갔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하고 움막생활을 하는 이제현에게 시묘살이는 우주적 자아로 들어가는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상복을 입는 중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 그의 몸은 삭정이처럼 수척해져갔다.

유배 간 스승 백이정을 찾아 남해로 가다

해가 바뀌어 임술년(1322, 충숙왕9) 새해가 밝아왔다.

우대언(右代言, 밀직사의 정3품) 경사만(慶斯萬) 등은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원나라 중서성에 상소를 올렸다.

“충숙왕을 복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안축도 충숙왕의 죄 없음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화를 입으면 신하는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왕고 세력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대신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설상가상,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백이정이 충숙왕의 복위를 꾀하다 남해로 유배를 간 것이다.

아버님의 삼년상을 치루기 위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이제현은 난감했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스승인 백이정의 연세는 76세. 노구를 이끌고 낙향한 스승이 귀양 생활 중 타계하기라도 한다면 생전에 다시 뵐 기회가 없게 된다.’

더구나 백이정의 딸이 이제현의 둘째 아들 이달존과 혼인했으니, 백이정과 이제현은 단순한 사제지간을 넘어 사돈관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현은 스승의 유배지를 찾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님께 불효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박충좌와 함께 남해로 가기로 결정했다.

개경에서 예성강 초입의 벽란도항까지 40여리 길은 사람들이 처마 밑으로 다녀 눈비를 피하고, 여름에는 그 그늘로 다닐 정도로 번화하고 붐비는 길이었다.

이제현과 박충좌는 말을 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 포구에 당도한 후, 다시 배를 갈아타고 스승 백이정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남해군 우지막골의 군자정(君子亭)으로 향했다.

군자정 옆에는 백이정이 심은 느티나무 당산목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주위에는 노송 수십 그루가 군자처럼 버티고 서 있어 거문고처럼 생긴 뒷산과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펼친 것과 같았다.

적막하기만 하던 유배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드니 섬마을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백이정이 반갑게 제자들을 맞이했다.

“익재, 치암, 자네들이 불원천리 먼 길을 이렇게 달려오다니……. 고맙구먼.”

“스승님, 유배생활에 얼마나 고초가 많으시옵니까?”

“바다와 동무하고 사는 삶도 아름답기 그지없다네.”

“스승님, 병고가 크셔서 많이 수척해지셨사옵니다.”

“옛 성현들이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시지 않았는가?”

“스승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저희 제자들이 부끄럽사옵니다.”

“난 여기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할 생각이네.”

“…….”

“안향 선생으로부터 배운 성리학을 내가 자네들에게 이어줬으니, 자네들의 역할이 막중하네. 아마도 백년 뒤에는 성리학이 크게 성하게 되리라 생각하네.”

“스승님께서 펼친 학문을 저희들이 잘 계승하겠사옵니다.”

며칠 후, 스승 백이정과 꿈같은 시간을 보낸 이제현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개경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박충좌는 스승의 유배지에서 함께 기거하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박충좌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스승에게 문안을 드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 빨래며 청소하는 일까지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스승의 기분을 살펴 책을 펴고 들어가 의문나는 점을 여쭈어보았다. 그러다가 밤이 깊으면 스승의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린 후 취침에 들어갔다.

스승이 귀양살이에서 병약해지자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야를 누비며 약초를 구해다가 탕약을 지어 올렸다. 조악(粗惡)한 소찬이나마 스승이 식음을 거를 때는 자신도 끼니를 때우지 않았다.

한편, 찬성사 권한공, 채홍철 등의 왕고파 일당은 백관들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아놓고 충숙왕을 비난하고 심양왕 왕고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자는 글을 작성하여 서명을 요구했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며 벼락이 치고 크기가 자두와 매실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이처럼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에 대해 하늘도 노했지만, 간신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나라 중서성에 참소를 올렸다.

충숙왕은 이미 눈이 먼 데다가 귀까지 멀어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불구자입니다.

충선왕이 충숙왕을 고려국왕으로, 왕고를 세자로 책봉한 것이 이미 오래전입니다. 그런데 충숙왕과 임백안독고사가 공모하여 김이로 하여금 충선왕을 꾀어 왕고의 세자인을 훔쳐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선왕이 지급했던 왕고의 토지와 사택과, 그리고 유청신·오잠 등 140여 명의 토지와 사택을 강탈하였습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삼 불 망(三不忘) 29

1321년(충숙왕8) 4월. 부전자전이라 할까. 충숙왕도 아버지 충선왕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그는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에서 절치부심하며 3년을 보내게 된다.

충숙왕의 원나라 소환으로 고려는 사실상 국왕 궐위상태가 되었다. 상왕인 충선왕은 이미 1년 전부터 티베트에 유배되어 국왕으로 복귀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왕고가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였다. 이로써 고려에서는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었다.

한편, 정의감이 남달리 강한 최해는 요양로 개주판관에 부임한 지 5개월 만에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그 해 9월 초에 갑자기 귀국했다. 이는 최해가 이제현과 함께 심양왕을 추대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그해(1321년) 9월 중순. 충숙왕의 빈자리로 조정이 어지러운 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이제현은 송악산에 꼿꼿이 서 있는 소나무처럼 남들이 뭐라 하든지 자신의 뜻을 세우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불행은 겹으로 온다’고 했던가. 설상가상으로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이 병환으로 운명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제현이 조정의 혼란과 아버님의 병환으로 하루하루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골목길을 돌아 수철동집 대문으로 황급히 말을 달려오는 청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숙부님, 익재 숙부님!”

청년은 대청마루에 서성이는 이제현을 발견했는지 목 터지게 소리쳤다. 귀에 익은 목소리. 청년은 충렬왕 21년(1278)에 성균시 문과에 장원하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져 있던 백씨 이관(李琯)의 큰아들인 장조카 석종(石種)이었다.

이제현의 뇌리 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아버님에게?”

이제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석종이 가지고 온 비보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숙부님! 대체 이 일을…….”

“무슨 일이더냐? 무슨 일이기에 그리 허둥대느냐?”

“숙부님, 할아버지께서 위중하십니다. 아침부터 신열에 시달리시더니 의식이 혼미하십니다. 대체 이 일을 어찌하면 좋사옵니까!”

이제현은 급히 말을 달렸다. 그는 오직 아버님의 의식이 회복되기만을 빌면서 채찍을 휘둘렀다.

‘아버님, 소자가 가옵니다. 제발 그때까지…….’

이제현의 기도가 천지신명에게 전해진 것일까. 백씨 댁에 당도한 이제현이 아버지가 누워 계신 방문을 열었을 때, 이진은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아버님……!”

이제현은 울부짖었다. 절규와 같은 그의 통곡을 지켜보던 큰형 이관과 형수, 동생 이지정(李之正), 그리고 조카들은 눈시울을 적시었다. 이 자리에는 둘째 형 체원(體元) 스님도 합장하고 있었다. 체원 스님은 20세 전후에 출가해서 선불장(選佛場)에도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며, 충선왕의 지우(知遇, 자기의 학식을 남이 알고 후하게 대우함)를 받아 법수사·반룡사·해인사 등지의 화엄종단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후 명찰(名刹)의 주지직을 제수 받기도 하였으나 노부모의 부양을 위해 이를 거절하고 이관의 집에서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고 있었다. 체원 스님은 한시도 아버지의 좌우를 떠나지 않고 탕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고 올리는 효자였다.

“오, 제현이 왔느냐…….”

“예, 아버님…….”

“이 아비는 이제 틀렸는가 보구나…….”

“아니옵니다. 아버님. 기력을 회복하소서…….”

“생자필멸이라고 했느니……다만, 내 너에게 일러줄 말이 있느니라.”

“말씀하소서.”

“나라에는 하루라도 왕이 없으면 안 되는데…… 지금 상왕과 왕이 모두 궐위되어 있어. 이는 고려가 창업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일이야. 나라의 녹을 먹는 신하는 모름지기 종사를 먼저 걱정해야 하느니라…….”

목숨이란 정말로 속절없는 것일까. 종사의 일만 걱정하고 집안을 위해 전하는 마지막 유언도 다하지 못한 채 이진은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렸다. 방안은 온통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아버님, 흑흑흑!”

관직에서 은퇴한 뒤 시와 술로 소일하던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이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의로운 선비의 길을 걸어온 이제현의 뒤에는 아버지의 태산교악(泰山喬嶽)과 같은 가르침이 버티고 있었는데, 그런 학문적인 스승이 세상을 버린 것이다.

정승을 지낸 이진의 죽음에 조문객들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평생지기인 박충좌, 안축, 최해가 문상 와서 한 목소리로 이제현을 위로해줬다.

“작고하신 어른은 복된 인생을 사셨네. 자손들이 모두 번성하고 어른도 천수(天壽)를 다하시지 않았는가.”

이제현은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아닐세, 나야말로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이네. 어버이의 은혜는 넓고 큰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거늘, 종사의 일을 본답시고 지난 세월 아버님께 대죄를 지었네. 그 죄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지 하늘이 두렵네. 진(晉)나라 왕상(王祥)은 계모를 위해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드렸고, 오대의 맹종(孟宗)은 한겨울에 노모를 위해 눈물로 대숲에서 죽순을 돋게 했지만, 나는 아버님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다네.”

장례를 도와주고 있던 문생인 이곡, 안보, 백문보, 윤택 등은 스승 이제현의 건강을 크게 걱정했다.

“스승님, 통곡을 하시다가 벌써 몇 번이나 까무러치셨사옵니다. 이제는 너무 절통해 하지 마시오소서. 몸이 상하실까 걱정이 되옵니다.”

발인을 끝낸 이제현은 아버지를 선영의 발치에 모셨다. 이후 벼슬을 그만둔 뒤 못 다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시묘(侍墓)살이에 들어갔다.

굴건제복(屈巾祭服)을 하고 움막생활을 하는 이제현에게 시묘살이는 우주적 자아로 들어가는 죽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상복을 입는 중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아 그의 몸은 삭정이처럼 수척해져갔다.

유배 간 스승 백이정을 찾아 남해로 가다

해가 바뀌어 임술년(1322, 충숙왕9) 새해가 밝아왔다.

우대언(右代言, 밀직사의 정3품) 경사만(慶斯萬) 등은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원나라 중서성에 상소를 올렸다.

“충숙왕을 복위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시옵소서.”

안축도 충숙왕의 죄 없음을 호소하였다.

“임금이 화를 입으면 신하는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왕고 세력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대신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설상가상, 무엇보다 안타까운 일은 백이정이 충숙왕의 복위를 꾀하다 남해로 유배를 간 것이다.

아버님의 삼년상을 치루기 위해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이제현은 난감했다. 그는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스승인 백이정의 연세는 76세. 노구를 이끌고 낙향한 스승이 귀양 생활 중 타계하기라도 한다면 생전에 다시 뵐 기회가 없게 된다.’

더구나 백이정의 딸이 이제현의 둘째 아들 이달존과 혼인했으니, 백이정과 이제현은 단순한 사제지간을 넘어 사돈관계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현은 스승의 유배지를 찾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님께 불효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박충좌와 함께 남해로 가기로 결정했다.

개경에서 예성강 초입의 벽란도항까지 40여리 길은 사람들이 처마 밑으로 다녀 눈비를 피하고, 여름에는 그 그늘로 다닐 정도로 번화하고 붐비는 길이었다.

이제현과 박충좌는 말을 타고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 포구에 당도한 후, 다시 배를 갈아타고 스승 백이정이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남해군 우지막골의 군자정(君子亭)으로 향했다.

군자정 옆에는 백이정이 심은 느티나무 당산목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주위에는 노송 수십 그루가 군자처럼 버티고 서 있어 거문고처럼 생긴 뒷산과 조화를 이루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펼친 것과 같았다.

적막하기만 하던 유배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드니 섬마을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백이정이 반갑게 제자들을 맞이했다.

“익재, 치암, 자네들이 불원천리 먼 길을 이렇게 달려오다니……. 고맙구먼.”

“스승님, 유배생활에 얼마나 고초가 많으시옵니까?”

“바다와 동무하고 사는 삶도 아름답기 그지없다네.”

“스승님, 병고가 크셔서 많이 수척해지셨사옵니다.”

“옛 성현들이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시지 않았는가?”

“스승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저희 제자들이 부끄럽사옵니다.”

“난 여기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할 생각이네.”

“…….”

“안향 선생으로부터 배운 성리학을 내가 자네들에게 이어줬으니, 자네들의 역할이 막중하네. 아마도 백년 뒤에는 성리학이 크게 성하게 되리라 생각하네.”

“스승님께서 펼친 학문을 저희들이 잘 계승하겠사옵니다.”

며칠 후, 스승 백이정과 꿈같은 시간을 보낸 이제현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개경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박충좌는 스승의 유배지에서 함께 기거하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박충좌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스승에게 문안을 드리고,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물론 빨래며 청소하는 일까지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스승의 기분을 살펴 책을 펴고 들어가 의문나는 점을 여쭈어보았다. 그러다가 밤이 깊으면 스승의 이부자리를 봐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린 후 취침에 들어갔다.

스승이 귀양살이에서 병약해지자 망태기를 둘러메고 산야를 누비며 약초를 구해다가 탕약을 지어 올렸다. 조악(粗惡)한 소찬이나마 스승이 식음을 거를 때는 자신도 끼니를 때우지 않았다.

한편, 찬성사 권한공, 채홍철 등의 왕고파 일당은 백관들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아놓고 충숙왕을 비난하고 심양왕 왕고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자는 글을 작성하여 서명을 요구했는데,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이며 벼락이 치고 크기가 자두와 매실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이처럼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에 대해 하늘도 노했지만, 간신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나라 중서성에 참소를 올렸다.

충숙왕은 이미 눈이 먼 데다가 귀까지 멀어 벙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는 불구자입니다.

충선왕이 충숙왕을 고려국왕으로, 왕고를 세자로 책봉한 것이 이미 오래전입니다. 그런데 충숙왕과 임백안독고사가 공모하여 김이로 하여금 충선왕을 꾀어 왕고의 세자인을 훔쳐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선왕이 지급했던 왕고의 토지와 사택과, 그리고 유청신·오잠 등 140여 명의 토지와 사택을 강탈하였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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