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려면 너부터 쳐내야”

김갑렬(GS건설 부회장) · 손관호(SK건설 전 부회장) · 한수양(전 포스코건설 사장)

건설사 최고경영자(CEO)들의 속병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건설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실적이 악화되면 CEO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지사. 실제 건설업계는 CEO 물갈이가 한창이다. 임기는 고사하고 1년을 채우지 못하는 일도 태반이다. 이들은 대부분 ‘일신상의 사정’으로 물러났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드물다. 건설업계 CEO 교체 속사정을 짚어봤다.

“불경기 CEO에게 임기가 어디 있습니까.”

한 건설업체 관계자의 말이다. 이 관계자는 최근 건설업계 ‘CEO의 줄사퇴’에 대해 “건설업계 CEO자리는 계약직만큼 불안하다”고 덧붙였다.

최근 건설업계에서 잇따르는 CEO 교체는 임기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 취임 1년도 안 돼 사퇴하거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상황이다. 내로라하는 대형건설사도 예외는 아니다. SK건설, GS건설, 포스코건설의 CEO가 잇따라 바뀌며 CEO의 설 자리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부채 증가에 물갈이 SK건설

건설업계 CEO 물갈이의 선봉에 선 것은 SK건설이다. SK건설은 지난해 11월 사장 인사를 발표했다. 이전까지 SK건설 공동대표이사를 맡았던 손관호 부회장과 유웅석 부회장은 대표이사 자리를 내주고 경영일선에서 후퇴했다. 이들 후임으로 유석경 SK C&C 사장이 SK건설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단독으로 대표이사를 맡게 됐다. 손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임시주주총회 이후 사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SK건설의 이와 같은 대규모 인사는 건설업계 구조조정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특히 SK건설은 대주단에 가입한 10대기업으로 거론되면서 자칫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받고 있다. 지난 3분기 부채비율이 300%가 넘는 탓이다.

SK건설 관계자는 “대주단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위기상황에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은 경영자가 그룹 차원에서 선정됐다”고 밝혔다.

GS건설은 CEO사퇴 이후 오너경영 체제로 탈바꿈한 경우다.

전문경영인 김갑렬 공동대표가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사실상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 사장으로 임명된 허명수 사장이 단독대표로 선임됐다. 허 사장은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셋째 동생으로 GS건설 주식을 3.62% 보유 중이다.


오너체제 자리 잡은 GS건설

오너의 등장을 두고 GS건설 측에서는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으로 환경 변화 대응력 강화’란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전문경영인 체제로 바꾸고 있는 가운데 굳이 오너경영을 택한 데는 그만큼 절박한 이유가 있다는 뒷말도 나돈다. 실제 김 전 사장은 지난해 12월 신용등급이 깎이면서 체면을 구겼다. 당시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GS건설의 재무 건전성과 유동성 등이 취약하다고 판단해 신용등급을 기존 ‘Baa1’에서 ‘Baa2’로 하향조정 했다.

결국 허 회장은 이 같은 난국을 돌파해야한다는 과제를 안은 셈이다. GS건설의 미분양 물량 증가, 유동성 위기설 확산 등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 자칫 경영실적 회복에 실패한다면 오너경영제에 대한 책임론까지도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비리혐의로 수장 교체 포스코건설

포스코건설은 전임 CEO가 사고를 쳐 마지못해 교체된 케이스다.

포스코건설은 지난해 11월 한수양 사장이 이유로 전격사임을 했고, 후임으로 정준양 포스코 사장이 취임했다. 하지만 한 전 사장의 퇴직은 사실상 떠밀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최근 정부의 공기업 비리 수사과정에서 에너지설비 관련 업체 케너텍 이 모 회장에게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혐의를 받아 불구속 기소됐기 때문이다. 결국 한 전 사장은 포스코건설의 체면을 대폭 구기면서 불가피하게 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후임으로 올라온 정 사장은 포스코건설의 임원이 아닌, 모기업인 포스코 3인 공동대표 중 한명이다. 포스코에서 계열사 간 사장 이동이 흔치 않았던 만큼 정 사장의 취임은 업계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받고 있다.

정 사장은 광양제철소장 등을 거쳐 지난해부터 포스코 생산기술부문 대표이사 사장을 맡아온 철강 전문가다. 건설부문에서 어떤 성과를 보여줄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중견건설사도 물갈이 한창

이런 CEO교체는 중견 건설사로 넘어갈수록 더욱 빈번하게 이뤄진다.

벽산건설도 지난해 말 총수인 김희철 회장이 대표이사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전문경영인인 김인상 전 대표이사에게 경영전권을 맡긴 지 2년만이다. 신성건설 역시 지난해 12월 윤문기 대표이사가 일신상의 사유로 사임함에 따라 기존 신영환ㆍ윤문기 공동대표 체제에서 신영환 단독대표 체제로 변경됐다. 심지어 지난해 2월 경남기업 공동대표이사로 취임했던 정재영 사장은 1년도 못돼 고문으로 물러나고 강창모 단독 대표체제가 됐다.

업계는 잇따른 CEO 교체가 건설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불경기 CEO의 교체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며 “이들 CEO 교체를 통해 어떻게 난국을 돌파할지 지켜볼 문제”라고 내다봤다.


# 재계 실적 나쁜 CEO, 누가 교체됐나

본지는 지난 <663호>에 ‘위기의 CEO 성적표’ 보도를 통해 실적 나쁜 재계의 CEO들을 꼽았다. 경기 악화에 따른 CEO의 교체가 적지 않을 것을 내다본 것이다. 실제 거론된 한진해운 박정원 사장은 지난해 말 정기인사를 통해 퇴직했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경쟁사에 비해 유독 나쁜 실적으로 업계의 우려를 샀던 바 있다.

해외사업 부진을 이유로 거론된 김신배 SK텔레콤 사장도 SK C&C 부회장으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SK텔레콤 CEO자리를 떠나게 됐다. 이를 두고 업계 일각에서는 좌천이라는 평가부터 보직을 바꾼 것뿐이라는 해석이 줄을 잇고 있다.

업계에서는 재계 CEO 퇴진이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CEO의 평균수명이 3년도 미치지 못했던 만큼 이번 경기악화는 적잖은 책임 사퇴를 불러오리라는 관측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향후 3월 결산법인 CEO 역시 대거 교체가 되리라는 우려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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