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지금 우먼파워 전성시대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 · 정지이 현대U&I 전무 ·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왼쪽상단부터 시계방향)

연초부터 재계의 여성 CEO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연말연시 각 기업 인사에서 남성들의 전유물로 인식돼온 대기업의 수장 자리에 오르는가 하면 소위 ‘별을 단다’고 비유되는 임원 승진 인사에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남성 CEO에게 익숙했던 엄격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달 방식은 구시대의 산물로 인식될 정도다. 주목받고 있는 여성CEO들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봤다.

재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CEO들 가운데 상당수는 갑작스런 남편의 작고로 기업을 물려받은 경우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 등이 대표 사례다.


주부에서 오너로

우선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사연이 가장 남다르다. 현 회장은 남편 정몽헌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평범한 주부 신분을 벗고 경영인의 삶을 선택했다. 2003년 8월의 일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암초’ 투성이였다. 시숙인 정상영 회장을 비롯한 범현대가가 이른바 ‘섭정’을 선언한 탓이다.

범현대가와 현 회장 간의 대립은 2003년 10월 현 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에 취임하면서부터 가시화됐다. 시숙 정 회장은 KCC을 앞세워 꾸준히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물론 경영권 확보 차원에서였다.

그러나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현 회장이 아니었다. ‘현대그룹 국민기업화’를 선언, 국민주 1000만주를 공모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양측간 팽팽한 대립은 2004년 2월 증권선물위원회의 중재로 결국 일단락됐다.

당시 증권선물위원회는 시숙 정 회장에게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전량을 처분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범현대가와 현 회장 간 갈등의 골은 남아 있는 상태다.

지난해 12월 30일 이사회를 통해 한진해운 대표이사로 선임된 최은영 회장도 남편의 뒤를 이어 경영 전반에 뛰어든 사례다.

2006년 11월 남편 조수호 회장이 타계한 뒤 이듬해 부회장으로 선임된 최 회장은 2008년 회장으로 올라섰다. 이어 같은 해 말 대표이사직까지 꿰차며 여성CEO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최 회장이 주목받는 이윤 또 있다. 그동안 최 회장을 보좌하면서 전문경영인 역할을 해오던 박정원 사장이 고문으로 물러난 까닭이다. 사실 최 회장은 이전까지만 해도 남편 조 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사회공헌 활동에 더 치중해 왔다.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도 2004년 폐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남편 양회문 회장을 대신해 경영 일선에 나서게 됐다. 암 선고 이후 남편을 살리기 위해 3년간 병수발을 들었지만 끝내 ‘미망인’이 됐다.

이러한 탓에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28년 동안 평범한 주부로 산 그가 과연 ‘경영의 경자나 알겠느냐’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재계의 이러한 염려를 한방에 날려 보냈다. 경영 전반에 나선 이 회장은 ‘월급 10% 인상’과 ‘현장경영’ 등으로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회장 취임 직후 직원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월급을 올렸고 110개 전국 영업점을 모두 돌며 직원을 일일이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공주의 삶’ 버려

이밖에 ‘공주의 삶’을 스스로 포기한 사례도 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 바로 이러한 케이스다.

우선 이명희 회장이 이끄는 신세계그룹은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한 기업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삼성에서 분리할 당시 신세계는 백화점 한 두 개와 조선호텔 정도였다. 하지만 이 회장은 백화점은 물론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시스템, 조선호텔, 신세계인터내셔널 등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신세계를 성장시켰다.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지 불과 7년 만에 빚어낸 성과였다. 이러한 성장 배경에는 이 회장의 국제감각이 밑거름이 됐다.

이 회장은 “아버지(故 이병철 회장)가 돌아가신 뒤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고, 그때 미국에서 프라이스클럽(회원제 창고형 할인점)과 월마트(할인점)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의 경영자 데뷔는 시쳇말로 ‘독고다이 형’이라 말할 수 있다. 대성산업 창업자인 고 김수근 전 회장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김 회장은 재벌 2세의 특권을 거부한 채 혼자 일어섰다.

김 회장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이는 다름 아닌 넷째 오빠였다. 그가 이화여고 2학년 때 가장 의지했던 넷째 오빠가 자살한 것. 이후 김 회장은 대학 진학도 포기할 만큼 큰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곧 마음을 추스른 김 회장은 부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미국과 영국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안락함이 보장된 피동적인 삶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치열한 삶을 이뤄보겠다는 결의에서였다.

김 회장은 “오빠의 죽음을 보면서 오빠의 삶까지 살아주겠다는 결심을 했고 화려한 파티, 호화판 생활, 정략적 결혼 등 보호막 속에서 살아야 하는 전형적인 삶에 회의가 일어 집안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며 당시를 회상한 바 있다.


#재벌 3세 30대 장녀가 ‘대세’

착실한 경영 수업 2009년 재계 키워드 급부상

‘재벌가 3세ㆍ30대ㆍ장녀’

2009년 재계에서 떠오르고 있는 키워드다. 최고 경영자였던 할아버지와 부모의 뒤를 이어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는 재벌가 3세 30대 장녀들이 주목받고 있다.


>>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

경영일선에 나와 있는 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큰딸 이부진 호텔신라 상무다.

대원외고와 연세대 아동학과를 졸업한 이 상무는 1995년 삼성복지재단 기획지원팀에서 경영수업을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삼성전자 전략기획팀 과장을 지낸 이 상무는 2001년 8월 호텔신라 기획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2004년 경영전략담당 상무보, 2005년 상무로 잇달아 승진했다. 핵심경쟁력 개선과 프로세스 혁신 부문에서 성과를 인정받은 것이다. 올해엔 승진연한 3년을 꼬박 채워 전무로 또 한 번 진급했다.

한편 이 상무는 지난해 4월 삼성석유화학 최대주주(33.19%)로 등극, 비상장 기업지분을 평가할 경우 여성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주식 부호다.


>>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장녀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 또한 어머니 뒤를 이어 경영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사촌인 신라호텔 이부진 상무와는 업계 라이벌인 셈. 이명희 회장은 이건희 전 회장의 동생이다.

호텔 경영에 먼저 나선 사람은 정 상무다. 정 상무는 이화여대(비주얼디자인 전공)와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그래픽디자인 전공)를 졸업하고 1996년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호텔 경영에 뛰어들었다. 2003년부터 조선호텔 프로젝트실 상무로 일하고 있다.

한편 정 상무는 지난해 12월 16일 기준 한국의 여성 주식부호 4위에 올랐다. 재벌 3세 중에서는 단연 1위다.


>> 정지이 현대U&I 전무

현대가에는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가 있다. 정 전무는 지난 2003년 8월 현대그룹 본사 사옥에서 자살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1남 2녀 가운데 맏이다.

정 전무는 2004년 현대상선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재정과 회계 분야 실무를 맡는 등 평범하게 후계자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2006년 그룹의 IT 계열사인 현대유엔아이 상무로 승진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2007년 전무로 고속 승진한 정 전무는 이 회사 지분 9.1%를 보유, 3대 주주로 우뚝 섰다.

한편 정 전무는 현대그룹에서 어머니인 현정은 회장의 심중을 가장 정확하게 읽는 인물로 꼽힌다.


>> 현정담 동양매직 상무보

1월 1일 발표된 동양그룹 인사에서는 현재현 회장 장녀인 현정담 동양매직 부장이 상무보로 승진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현 상무보는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의 맏딸이자 창업주인 고 이양구 회장의 외손녀다.

현 상무보는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학 석사(MBA) 과정을 마친 뒤 2006년 10월 동양매직 차장으로 입사한 뒤 2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했다.

이 밖에 현 상무보는 동양매직의 최대 개인주주이기도 하다. 현 상무보는 동양매직 주식 3.54%를 갖고 있다. 오너 일가 중에서는 딱히 동양매직 지분을 갖고 있는 개인이 없다는 점에서 향후 현 상무가 동양매직 차기 오너가 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고 있다.


##재벌 3세 ‘노가다’한 사연

현장 경험을 중시하는 총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색적인 경영수업을 받았던 재계 3세들이 눈에 띈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허윤홍 GS건설 과장은 한때 LG칼텍스 정유소의 ‘총잡이(주유원)’로 활약했다.

“충분한 현장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허 회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재벌 총수의 아들이 아르바이트생들이나 할 법한 주유원이었다는 사실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행보했다.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의 큰아들인 김남구 한국투자증권 부회장도 남다른 경영수업을 받은 소유자 중 하나다. 바로 참치 잡는 ‘선원’이 된 것이다.

지난 1986년 동원산업의 신입사원이었던 그는 원양어선을 타고 4개월 남짓 남태평양과 베링에로 참치잡이로 나선 바 있다. 당시 김 부회장은 하루 16시간씩 중노동을 했지만 ‘로열 패밀리’라는 사실을 숨겨왔다고 한다. 이 일화는 지금도 재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힌다.

이 밖에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도 아버지의 스타일답게 ‘현장수업’을 착실히 밟은 케이스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지방에 있는 공장에 내려가 현장 분위기를 익히고 식당에 가서 직원들과 같이 밥도 같이 먹으며 종업원들과의 친밀도를 높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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